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기온이 30℃가 넘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 토요일. 과연 누가 강연을 들으러 올까 싶었는데 의외로 강연장이 가득 차서 의자를 더 놓아야 했다. 예정 시간 십 분 전만 해도 연사 노베르트 퀸 교수, 우정섬 공원 책임자와 나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서로 마주 보며 이거 파리 날리는 케이스인가 보다 싶었는데 6시가 되자 갑자기 청중들이 몰려들어 왔다. 알고 보니 더워서 모두 공원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시원한 그늘을 떠나 한증막 수준의 유리 강연장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이 예뻐 보였다.

지난 8월 24일 토요일 오후 6시에 포츠담 우정섬 공원 유리 전시장에서 열렸던 ‘기후변화 시대의 식물적용’이라는 강연에 관한 얘기다. 기후변화 이야기를 그만하려고 했다. 그만한다기보다는 독자들이 지겨워할 것 같아서 좀 쉬었다가 다시 꺼내려 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의 강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앞으로는 정원에 옥수수를 심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 있는 칼 푀르스터 재단에서 기획한 강연회였다. 연사는 베를린 공대 조경 환경학과에서 ‘식물 테크닉과 식물 적용학’을 강의하고 있는 노베르트 퀸 교수. 칼 푀르스터 재단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강연회를 주최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칼 푀르스터 선생이 이미 백 년 전에 ‘정원의 입지를 먼저 분석하여 기후 조건에 맞는 식물을 심어야 한다’며 처음으로 세계를 식물 기후대로 분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식물학자적 관점이 아니라 식물을 적용하는 정원사의 관점에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개념이 후일 식물적용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가 주창한 일곱계절 정원의 개념은 바로 이런 기후학적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식물이 요구하는 기후 생태적 조건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 부합되게 심어 관리한다면 일곱 계절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후 조건이 크게 변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퀸 교수는 칼 푀르스터를 인용하는 것으로 강연을 열었다. 그리고 여태 백 년 동안 대를 물려가며 연구하고 발전시켜 놓은 식물적용의 원칙들이 이제 쓸모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했다. 이어 여러 기후 시나리오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지구의 평균 기온이 2℃ 가량 높아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듣기에 2℃라면 별 것 아닐 것 같은데 온난화 자체보다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여러 이상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봄이 사라지고 여름에 폭염, 강우, 건조 현상이 오고 겨울이 따뜻하고 습해졌다. 전반적으로 강수량은 변하지 않았지만 높아진 기온과의 관계 속에서도 문제가 되고 무엇보다도 강수 행태가 달라져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앞으로는 이러저러한 나무와 꽃을 심으세요.”라고 얘기해 줄 것을 기대했다면 오해다. 강연 뒤에 나온 질문들로 미루어 보아 청중들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 아직 아무도 어떤 식물을 심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보다는 문제점을 상기시키고 같이 해법을 찾아가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몇 가지 전략적 제언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면 이런 문제가 나타날 것이고 저렇게 하면 저런 문제가 또 발생할 수 있다.”라고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변화한 기후가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4월 기온이 30℃까지 올라갔다가 5월에 꽃샘추위가 오기도 하고 겨울이 온난하고 습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서리가 내리는 등 아직은 종잡을 수가 없다. 여름 더위도 그리 신용할 만한 것이 못된다. 불과 2년 전, 2017년에는 여름 내내 비가 오고 서늘해서 베를린 국제정원박람회 방문객 수가 반 정도에 그쳤었다.

남독의 카시안 슈미트 교수 등 일련의 식물적용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대륙의 프레리 식물에 주의를 기울여 왔다. 프레리 식물들은 뿌리가 최소한 2m에서 때로는 수십 m까지 내려가는 것이 있어 건조대에서도 지하수를 찾아가며 살아남는 식물들이다. 추위에도 강해서 허허벌판의 모진 바람과 강추위에도 끄덕없다. 사초과 식물들이 많지만 겐티아나 아스터, 캐나다 아네모네, 에키나체아, 루드베키아, 미역취, 베르베나 등 보기에도 좋은 것들이 많아서 도시의 공공공간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검증된 프레리 식물을 주로 이용하는, 소위 말하는 뉴저먼 스타일이 탄생하기도 했다.

남독의 바인하임에 가면 헤르만스호프라는 정원 식물 전시 및 실험정원이 있다.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는 카시안 슈미트 교수는 이미 십여 년 전에 프레리 정원을 조성하고 지속해서 관찰해 왔다. 헤르만스호프에는 프레리 정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못도 있고 이 연못가에 넓은 잔디밭도 있다. 보통 독일 잔디밭은 겨울에도 푸르른 것이 특징인데 이제는 여름에 완전히 누렇게 타들어 간다. 그런데도 물을 주지 않고 관찰하는 중이다. 반면 누렇게 타들어 간 잔디밭과는 대조적으로 프레리 정원은 푸르다 못해 미어터지고 있다.

퀸 교수 역시 학과 부지에 프레리 밭을 만들어 놓고 직접 수년간 실험도 했으나 프레리 식물들이 독일 도시풍경을 지나치게 점령해 나가고 있다고 우려하며 비판적 태도를 고수해 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프레리 식물의 시대가 온 것이 아닌지”라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C4-식물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자고 제안했다. C4 식물이란 쉽게 말하자면 소가 되새김질하듯 되새김 기법으로 이중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전분 생산효율이 매우 높고 기후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일반 정원 식물들의 경우 잎 표면의 온도가 40℃에 도달하면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잎이 노랗게 변하고 급기야는 떨어지고 만다. 현재 독일 가로수나 공원 수목들이 그래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옥수수나 기장 등 곡식이 C4 대표 식물이고 역시 잡초 출신으로서 정원의 스타로 발탁된 억새도 이에 속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공원이나 정원에서 억새가 자라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괜히 억새가 아니다. 그런데 작물이 아니라 정원 식물 중에서 C4 식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C4 식물 중에서 정원에 심어도 좋을 만한 예쁜 식물을 찾기 어렵다. 강연이 끝난 뒤 한 동안 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모두들 별 뾰족한 아이디어가 없는 눈치였다.

칼 푀르스터 선생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옥수수를 예쁘게 개량 재배해서 정원에 심어 보세요.”

[한국조경신문]

헤르만스호프의 누렇게 타들어간 잔디밭.  [사진제공: Katzenberger-Ruf]
헤르만스호프의 누렇게 타들어간 잔디밭. [사진제공: Katzenberger-Ruf]
헤르만스호프의 프레리 정원에서 일명 나침반 풀이라고 불리는 Silphium laciniatum에 대해 설명하는 카시안 슈미트 원장 [사진제공: Katzenberger-Ruf]
헤르만스호프의 프레리 정원에서 일명 나침반 풀이라고 불리는 Silphium laciniatum에 대해 설명하는 카시안 슈미트 원장 [사진제공: Katzenberger-R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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