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세연정   [사진 지재호 기자]
고산 윤선도가 조성한 세연정 [사진 지재호 기자]

 

[Landscape Times 지재호 기자] 고산 윤선도(1578~1671)가 은둔 생활을 위해 찾은 보길도 입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연한 입도’라는 주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금산이었던 보길도의 변화와 윤선도의 행적들을 보면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논문이 발표돼 관련 학계에 새로운 반향이 일고 있다.

이태겸 에스이공간환경디자인그룹 공공디자인연구소 소장 겸 조경학박사와 김한배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가 집필한 ‘조선조 토지제도와 인식을 통해 본 보길도 윤선도 원림 조경 배경 연구’ 논문에 따르면 윤선도는 단순히 우연에 기인한 입도라기보다는 가문의 전장 확대 및 관리가 용이하다는 경제적 이점을 고려한 의도된 입도가 아닌가에 대해 주목했다.

이에 이태겸 박사와 김한배 교수는 부용동 원림의 조영의도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해 재해석했으며 그 배경에는 조선시대의 토지제도와 공간특성을 중심으로 풀어 나갔다.

논문에 의하면 조선시대 토지제도는 산림천택의 토지는 공유지였다. 그러나 금산을 제외한 지역은 입안과 분묘의 금양 등을 통해 공유지를 사유화하려는 행위가 활발했음에도 보길도는 금산으로 지정돼 민가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금산이었던 보길도를 윤선도는 어떻게 부용동 원림 등을 조영한 것일까. 사유화가 금지된 산림천택을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은 국왕의 사패, 지방 수령 입안, 그리고 분묘의 금양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이들 모두 조상 숭배의 목적이 지배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권리를 획득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가문의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남 지역 내에서 안정적으로 입지를 다져 온 해남윤씨가는 토지 매입과 간척지 개간을 통해 토지를 확장했다. 이는 윤선도 시대에도 간척사업을 통해 많은 토지를 확충했다. 간척지를 살펴보면 130ha 규모의 노화도 석중리, 200ha의 진도 굴포리, 해남 현산면 백포리 등 면적은 대단위로 조성됐다.

이에 대해 윤선도 관련 입안 문기를 통해 1637년 보길도 입도 이후에도 윤선도가 지속적으로 가문의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도서지역을 입안 받은 것은 간척지를 개간해 농경지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서지역 특산물을 획득하려는 게 주요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갯벌이 잘 발달한 연해지역과 섬 지역에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서남해 연안의 어장이나 염분은 사대부가에서 사유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잘 알고 있던 해남윤씨가는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어 경영하는데 수고와 비용을 감안해도 충분한 생산적 가치를 가지고 있던 맹골도의 소유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어전과 어선, 염분세를 통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어장이나 염분을 사유화해 세를 징수하는 것은 국가의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남윤씨가는 서남해의 도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해 이를 가문 경제력의 기반으로 삼은 것으로 논문은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엄청난 경제력과 지배력을 가진 최고의 경영자로서의 윤선도의 행적을 살펴볼 때 과연 윤선도의 보길도 입도는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보길도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은 남는다. ‘우연’이라는 추축은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1725~1756)가 영조 24년(1748년)에 보길도를 답사 후 기록한 ‘보길도지’에 서술된 내용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길도지’에는 “탐라(현 제주도)로 가는 길에...(중략)... 배를 보길도에 대고 들어갔다”라는 정황을 추축할 수 있는 정도만 나열돼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이에 대해 이태겸 박사는 “부용동 관련 선행 연구들은 보길도 입도의 이유를 주로 풍수지리와 은거로 들고 있으며, 윤선도가 보길도에 원림을 조성하는 것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토지제도 관련 연구는 이루어진 바가 없다”며 금산으로 지정된 보길도에서 어떻게 부용동 원림을 조영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윤선도의 보길도에 대한 애착과 노력은 각종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그 중 상소문에서 전략적 문구가 돋보였다. 금산 지역에서의 모든 행위가 금지된 시기인 1637년 윤선도의 보길도 입도에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상소를 통해 자신은 소나무 보호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밝히며 논란을 잠재웠다. 이후 1655년 소나무 보호를 위해 섬주민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자 섬에 사람이 사는 것이 송금에 이롭다는 입장의 상소를 올리는 등 위기의 순간마다 공적명분을 내세워 보길도를 지켜 온 것이라고 논문은 밝혔다.

논문은 금산으로 지정된 지역은 입장과 산림 벌채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음에도 보길도 원림의 입지 선택과 공간구성은 산림천택 제도와 인식의 범주 하에서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보길도는 선박용 선재와 동백기름 등 산림자원이 풍부하고 미역이나 전복, 소금 등 어염자원이 풍부한 점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를 통해 해남윤씨가의 해상활동과 연관해 살펴보면 보길도가 지닌 경제적 가치는 윤선도의 보길도 입도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태겸 박사와 김한배 교수의 이번 논문은 기존 연구에서 간과됐던 조선시대의 토지제도 및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금산으로 지정됐던 보길도에 윤선도가 정원을 짓는 것은 사회적 인식상 허용되지 않았던 행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선도는 금산의 관리라는 사회적 명분을 내세워 보길도에 입도 후 부용동 원림을 만들고 이를 통해 경제적 자원의 획득, 서남해안 일대에 분포한 가문의 전장을 관리하는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기존 '은둔'에 관한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부용동 원림을 자연미학적인 이상향이라고 봤다면 논문에서는 사회경제적 가치 창출도 원림 조영의 한 목적이었던 만큼 다양한 가치 발굴 및 주위의 유·무형 자원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를 통해 윤선도 부용동 원림을 포함한 전통원림의 문화경관적 의미를 더욱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논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이태겸 박사와 김한배 교수의 이번 논문은 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37권 제2호 통권 제108호에 게재됐다.

[한국조경신문]

 

서재로 이용된 동천석실. 격자봉 밑 낙서재와 무민당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진 지재호 기자]
서재로 이용된 동천석실. 격자봉 밑 낙서재와 무민당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사진 지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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