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 고정희 박사] 마치 전장에서 꼿꼿한 자세를 지킨 채 그대로 죽어 간 젊은 장수 같았다. 나무를 많이 보아 왔다고 여겼는데 그런 모습으로 죽어간 나무는 처음이었다. 그냥 너도밤나무가 아니다. 보기 드문 <좁은 잎 너도밤나무Fagus sylvatica 'Laciniata'> 인데 근 이십 년 가까이 곁에서 보아 왔고 나름 <정의 대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준 나무였기에 그 죽음에 면해 받은 충격이 여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무가 아니다. 베를린시에서 지정한 <매우 특별한 거목>에 속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클라이스트 파크라는 이름의 오래된 공원이 있다. 19세기 말까지 왕립 수목원이 있던 곳인데 수목원이 좁아져서 외곽의 넓은 곳으로 이전한 뒤 구 수목원의 핵심 부위는 공원이 되었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를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너무 길다 보니 모두 들 줄여서 그냥 클라이스트 파크라 부른다. 20세기 초에 이 공원을 빙 둘러싸는 형상으로 고등 법원, 예술대학 등의 건물이 차례로 들어섰다. 그 덕에 클라이스트 파크는 웅장한 건물로 이루어진 블록 안에 숨은 채 인근 주민들의 파라다이스가 되어 갔다. 좁은 잎 너도밤나무 외에도 은행나무, 캅카스 어머니 나무‘ – 원명은Pterocarya fraxinifolia인데 국명이 없는 데다가 나무의 형상이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여 나 혼자 어머니 나무라고 부른다. -, 산사나무, 뽕나무 등 일반 공원에선 보기 힘든 나무들,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아 공원의 수목 가이드 투어도 생겼다.

1913년 기존 유리 온실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등 법원을 지으면서 이미 서 있는 좁은 잎 너도밤나무를 건물 측면에 그대로 보존했다. 그새 나이가 근 이백 년이 되는데도 재배종이 되어서 10미터 크기에서 성장이 멈춘 상태지만 폭이 넓고 수형이 완벽한 아름다운 나무다. 그 모습이 마치 법원을 지키는 늠름한 장수 같기에 나름 정의대장이라 이름 붙이고 지날 때마다 인사를 건네곤 했다.

무엇이 그리 분주한지 한동안 클라이스트 파크를 찾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그 앞을 지나면서 문득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 봐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건조했던 차라 모두 들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 정의대장이 선 채로 죽어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8월 초, 한여름 녹음 속에서 홀로 완전한 갈색이 되어 서 있는 모습은 비장하고 처연했다.

다음 날 공원녹지과 담당자에게 문의 메일을 보냈다. 왜 죽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만 확실한 ‚사인을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나무 관리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던 차에 걱정을 토로할 대화 상대가 생겨 반가웠나 보다. 바로 답장이 왔다.

„너도밤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지속하고 있는 건조 폭염 현상 때문입니다. 너도밤나무가 유난히 건조에 약한 데다가 잎이 마른 순간 곰팡이가 번져 결국은 죽고 맙니다. 클라이스트 파크의 좁은 잎 너도밤나무의 죽음은 우리에게도 큰 비극이지만 속수무책입니다. 요즘은 대체 목을 심을 때 건조에 약한 너도밤나무를 피하고 그 대신 <기후변화에 강한 수목 목록>에 따라 다른 수종을 심습니다.“

<기후변화에 강한 수목 목록>은 전국 공원녹지국장 연합에서 개발하여 수년 전 발표한 것으로서 수목재배원과 기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줄여서 <기후 수목>이라 부른다. 이 기후 수목 목록을 보면 남부 수종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베를린 공원은 전통적으로 관수를 하지 않았다. 빙하기에 형성된 지형이어서 도시 내의 평균 지하수위가 4-10미터로 매우 높은 편이다. 뿌리 깊은 나무들이 알아서 지하수를 취하기 때문에 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잔디도 유럽 폭염 현상이 시작된 이래 여름에 갈색으로 타들어 가다가도 선선해지고 비가 부슬거리면 곧 회복되었다.

나무들, 특히 가로수들이 속속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이제는 물을 줘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시에서 예산도 잡았다. 올해는 예산을 증액했다는 소식이다. 극심하게 건조했던 지난해의 피해가 올해 속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베를린시에서 관리하는 가로수만 4만4000주, 공원 녹지의 나무를 다 합치면 수십만 주에 달하는데 이에 다 물을 줄 수 없어 우선 가로수만, 그중에서도 나이가 적은 나무의 집중 관리가 시작되었다. 한편 주민들을 대상으로 <내 집 앞 가로수 물주기>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클라이스트 파크처럼 블록 내부에 숨겨진 공원은 미처 관리하지 못한다. 고등 법원에서 물을 좀 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나라도 매일 양동이로 물을 날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은 너도밤나무 앞에 서서 망연해하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양동이로 몇 번 물을 준다고 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인을 치료해야 하는데 나날이 낮아지는 지하수위를 다시 높이기가 쉽지 않다. 시에서 온갖 대응책을 마련하긴 했어도 지속하는 불볕더위와 내리지 않는 비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모두 제갈공명이 되지 않는 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법원 옆의 정의대장 시신은 지금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해 두고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직 푸르던 시절의 좁은 잎 너도밤나무 [사진제공 고정희]
아직 푸르던 시절의 좁은 잎 너도밤나무 [사진제공 고정희]
꼿꼿하게 선채 그대로 박제된 모습 [사진제공 고정희]
꼿꼿하게 선채 그대로 박제된 모습 [사진제공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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