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봉 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김수봉 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필자의 디자인 스튜디오 수업은 이론-현장-프로젝트실습-크리틱-전시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진다. 디자인 스튜디오 과제의 평가를 위해 크리틱(mid-term critic과 final critic)시간을 갖는다. 학생들은 디자인 크리틱 시간에 필자와 다른 여러 교수들의 날카로운 질문을 가운데 두고 토론하면서 장래 조경가로 성장하는 발판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필자가 크리틱시간에 가장 많이 질문하는 내용 중 한 가지는 “이 나무는 왜 이 여기에 심었어요?” 와 같은 아주 단순하지만 논리에 대한 질문이다. 대상지에 어떤 분석을 통해서 프로젝트에 사용된 수목을 선택하고 식재장소를 어떻게 결정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크리틱은 결코 즐거운 시간이 아니다.

다른 교수들은 공간 분할의 당위성이나 시설물이나 입구 위치의 타당성, 가로등 위치의 적절성, 수목유지관리 등등 다양한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과제를 점검한다. 크리틱을 처음 디자인 스튜티오 수업에 도입하였던 몇 년 전만 해도 학생들은 필자의 질문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크리틱 시간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그냥 자기 생각에 예쁘고 좋아서 여기에 이런 시설을 배치하고 저런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 대답이 주류를 이뤘다.

이론시간에 강의와 발표를 조사와 분석방법에 대해 가르쳤지만 조사 분석이 부족한 조경 디자인 안이 대부분이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 나눈 조경학과 학생들은 ‘조경학과는 나무를 잘 알지 못해도 고상한 디자인과 관련 프로그램을 배우면 조경디자인’을 할 수 있는 곳 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수목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경학과 학생은 반드시 나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알고 있어야 조경디자인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지식은 조경학 교육의 기본이고 다른 건설관련 학과들과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기본을 모르면 절대 창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조는 기본적인 지식의 재배열 아닌가. 필자는 기본을 잘 모르면서 조경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시다시피 건축심의나 도시계획 그리고 경관심의위원회 등에서 조경 항목이 심의에서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수년전 어떤 건축심의에서 필자가 모아파트의 조경디자이너에게 “이 자작나무는 왜 여기에 심으셨어요?”하고 물어 봤다. 내 기억에 당시 조경설계를 담당하신 분은 나의 질문에 답을 잘 하지 못했다. 각종 심의에서 지금까지 나의 이 단순한 질문에 제대로 명확하고 적절하게 대답한 조경설계 담당자를 잘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조경디자이너는 묵묵부답이거나 그냥 공사비에 맞춰서라는 불성실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필자는 이렇게 된 원인을 학생을 잘못 가르쳐 사회로 보낸 나 같은 교수의 책임이 제일 크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이 뭔지 모르는 건 자신 탓’이라는 어느 건축가의 비판에도 동의한다.

심의가 있던 그날 필자는 학생들을 잘못 가르친 나를 자책했고 반성했으며 내 제자들이 앞으로 심의 현장에서 이런 기본적인 질문에 답을 못해서 창피를 당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잘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뒤로 필자는 조경디자인은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이고 논리여야 함을 제자들에게 늘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시작은 조경디자인의 기본인 나무의 이름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제자들이 나의 질문에 대답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조경과 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은 디자인이 논리가 아니라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나무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조경을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학생들은 그릇된 조경과 디자인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사회로 나간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제자들은 조경에 대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뒤로 하고 결국 조경계를 떠난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잘못된 학교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제자들에게 매번 던지는 내 단순한(?)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근대라는 시대정신과 이를 바탕으로 태어난 조경과 근대디자인의 탄생배경’을 반드시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잘 이해하면 학생들이 갑자기 나무를 공부해 보고 싶을지도 모르며 또 어쩌면 지금 하는 조경 공부에 대해 자부심이 생길 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근대(modern)’라는 말이 널리 사용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근대(modern)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로마자 'modernus·moderna'에서 유래하며, 이 용어는 문화사적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문화적 전환(via antiqua·via moderna)을 그 이전 시대와 구분하여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15세기 이래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르네상스의 문화, 예술 변화와 스콜라 철학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철학적 조류, 수학적 세계관에 따른 산업혁명과 과학·기술혁명 등의 변화가 동시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초래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엄청난 변화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이처럼 근대란 말은 다의적으로 쓰인 개념이었다. 나아가 15세기 이래의 변화된 시대상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고, 해체되는 보편성을 대체할 새로운 철학적 사유체계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모여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이 근대성이 18세기 이래 정치와 사회, 문화와 경제, 학문 등 인간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구체적으로 실현된 체계가 이른바 계몽주의 근대이다. 정치학자 하성복은 그의 책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에서 서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로, 경제적으로는 ‘산업자본주의’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도시화’로 그 특징을 요약했으며, 이 근대화를 탄생시킨 힘은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 하는 ‘이성(理性)’이었다. 이 이성의 힘으로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 국민국가가 체제가 이루어 졌으며 국민국가는 피치자(被治者)인 국민이 주권자인 국가 즉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조경이 탄생했다.

디자인은 이러한 산업혁명 시기에 탄생한 새로운 전문분야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디자인’의 저자 카시와기 교수는 디자인이 근대의 전문분야로 탄생한 시기를 산업혁명으로 보았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이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근대는 과거 유럽사회가 가졌던 방식과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의 방식을 출현시켰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왕족과 귀족을 대신하여 근대시민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탄생했다. 그들은 과거 소수의 권력자들을 위해 존재했던 과거의 생산방식을 대신하여 기계화된 대량생산 방식을 통하여 새로운 미학을 확립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생산형식을 탐색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근대디자인이다. 근대디자인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간의 정신과 사고 그리고 생활환경의 변화를 촉진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이 근대 디자인은 한마디로 말해 디자인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어떻게 변혁하고 어떠한 사회를 실현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근대프로젝트였다.

앞의 문장에서 디자인을 조경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유럽의 전통적인 수공예가 근대를 만나서 근대디자인이 되었듯이 봉건사회와 르네상스시대에 꽃을 피웠던 왕과 귀족을 위한 정원예술도 근대시민사회를 만나 공공을 위한 도시공원을 만드는 조경의 탄생을 가져 온 것이다. 조경은 디자인이 탄생한 근대시민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경과 디자인은 이란성 쌍둥이인 ‘근대프로젝트’였다.

필자는 조경진흥법에서 과학적 지식의 응용을 강조하는 조경의 정의를 좋아한다. 과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science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왔으며 이는 '지식'이라는 뜻으로 '안다'(I know)는 뜻의 접두사 scio-에서 파생했고, 인도-유럽 어근인 '분별하다' 혹은 '구분하다'라는 뜻에서 나왔다. 서구인들의 과학적인 생각이 바탕이 되어 근대를 탄생시켰고 그 시대정신을 배경으로 유럽에서는 근대디자인이 또 미국에서는 조경이 태어났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조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조경과 근대디자인 탄생의 산파역할을 한 ‘근대정신’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조경학과 학생은 반드시 조경디자인의 기본인 수목의 이름과 특성 즉 생리나 생태를 잘 알고 전공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우리 학생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이 뭔지 모르는 건 자신 탓’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다음 주에 예정된 졸업작품전 2차 크리틱에서 필자는 또 질문할 것이다. “이 나무는 왜 여기에 심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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