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Landscape Times] 다른 생명체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면 어떨까? 생각 뒤집기의 천재인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나무’에는 외계인을 위한 애완동물 인간사용설명서가 있다. 유명한 영화 ‘혹성탈출’에서 인간은 유인원에게 사육된다. 우리에 갇혀서 구경거리가 되고 먹거나 배설하는 것 모두 그 안에서 공개된 채 해결한다. 현명하고 용기 있는 유인원들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인간은 한갓 동물이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는 사람이 잡초 취급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한창 예쁜 소녀가 말이다. 앨리스가 한여름 낮에 꾼 꿈 이야기를 그린 이 동화에는 별별 희한한 동물도 많이 나오지만 정원과 식물도 등장한다.

정원에 핀 화려한 꽃들은 이 예쁘장한 소녀를 잡초 취급하고 구박까지 하곤 쫓아낸다. 앨리스를 천시하는 꽃들은 서로 자신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서는 전혀 다른 존재인 그녀를 알아보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꽃들이 볼 때 인간은 이상한 잡초인 게 맞을 것이다. 꽃들은 자신들이 인간에게 받은 그대로 인간을 대접한 거다. 인간은 식물들을 자기 취향대로 분류하지 않았던가? 식용, 약용, 잡초 등으로 말이다.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인 인간의 이 취향을 누가 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식용도 아니고 약용은 더욱 아닌 잡초들도 할 말이 있다. 인간이 우습게 여기는 잡초가 생태계에서 갖는 생명력과 위력은 대단하니까 말이다. 잡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잡초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이다.

잡초의 생명력은 왜 그리 강한지 어디서든 얼른 뿌리를 내리고는 꽃을 피운다. 작물들은 여러 가지 살뜰한 보살핌을 받아 토양 침투력 같은 자연적 능력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돌보지 않는 잡초는 꿋꿋한 생명력을 아직껏 가지고 있다. 잡초는 강한 뿌리로 땅 속으로 깊숙이 내려갈 수 있으며 골골대는 작물 뿌리들을 이끌고 깊은 땅 속으로 들어가서 수분을 쭉쭉 빨아올린다. 잡초 뿌리들이 표층토로 끌어올린 영양분은 작물들의 식사거리가 된다. 잡초는 비가 올 때나 사막의 강한 모래바람으로부터 흙을 보호해주는 완충역할을 해준다. 뿐만이 아니다. 어떤 식물이 뿌리에서 강한 독성을 뿜으면 잡초는 그것을 흡수해서 자신의 양분으로 만든다. 그러니 식물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인 땅을 잡초가 일구어주고 보호해 주는 셈이다.

그래서 숙련된 농부는 잡초를 적당히 남겨두어 작물과 함께 기른다고 한다. 정원사의 입장에서도 잡초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목적한 세련되고 예쁜 정원의 모습을 보존하려면, 잡초는 여전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제국주의의 이론적 뒷받침이 된 사회진화론의 주장에는 꽤 황당한 이야기도 있다.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는 강연집 ‘진화와 윤리’에서 식민지를 아직 꾸며지지 않은 황무지에 비유했다. 점령한 땅과 그 백성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정원 만들기’와 비슷하다고 했다. 즉 잡초를 제거하고 좋은 나무와 예쁜 꽃을 옮겨다 심고 관상용 돌들도 잘 배치하는 것이다.

정원은 규모가 크고 공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정원을 가진다. 정원은 자신의 꿈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고 후손을 양육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들에게 정원(庭園)은 가정(家庭)이기도 하다. 마음과 몸이 깃드는 사적인 공간을 물주고 양분주어 가꾸는 곳, 가정이 정원이다. 흙이 있는 곳은 돌봄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진실은 국가와 제도, 결혼, 우정, 교육 등등 인류의 문화 전반에 걸쳐있다. 그런데 이 가정이라는 정원에 잡초가 끼어들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제거한다!’ 이다. 식물 입장에서는 잡초든 작물이든 차별이 없다. 식물종들이 다양할수록 더욱 건강한 생태 환경에 놓일 테니까. 돌들도 자기가 옥이나 다이아몬드라고 뻐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모양과 색깔과 재질이 서로 다른 돌들이 섞여 지낼 뿐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구분하길 좋아하지 않는가? 인간의 눈에는 다이아몬드 원석과 그냥 돌멩이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내가 가꾸어야할 작물과 작물의 영양분을 탐내는 잡초는 함께 둘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고유정 사건’의 진실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정원을 원했고 한 번의 실패를 거쳐 다시금 얻은 정원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잡초는 이제 네 살 된 의붓아들이었다. 아이를 어찌어찌 처치하고 났는데 잊고 있던 잡초가 하나 더 있었다. 담밖에 있어서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한 식물이 담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전남편이다. 아이의 양육권은 그녀에게 있는데 아버지로서의 면접권을 주장하고 나왔다. 새로 만든 정원에 방해될 까 보아 친아들도 친정에 맡겼는데 이제 엉뚱한 전남편이 정원을 침범한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고유정은 잡초를 다루듯 여지없이 그를 뽑아냈고 불살랐다. (실제로는 다른 방법을 썼다. 이것은 비유의 표현이다) 물론 그녀를 합리화해 줄 생각은 없다.

단지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배경을 추측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가정의 표본이 존재한다. 식민지라는 꾸며진 정원처럼 우리 생각의 식민지로 머무는 곳이다. 세상은 변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다양한 모습의 가정(정원)이 뒤섞여 가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생명과학의 발달은 가정이라는 정원 자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소설 ‘멋진 신세계’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수요에 따라 공장에서 인간들이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이 소설에서는 ‘가정’ 이라는 단어가 멸시받는 금기어로 나온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서는 가정 자체가 잡초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변하지 않을 거라 여기며 소중하게 끌어안고 사는 현재의 규범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구분하고 차별하고 모범을 정하는 인간은 자신의 잣대 그대로 돌려받을 모양새다. 앨리스가 만난 정원의 꽃들이 제대로 보았는지 모른다. 생태계 지구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인간은 뽑아내야 할 잡초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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