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Landscape Times]소피아 여왕이 물러가고 나서 베를린 기온이 치솟기 시작하더니 6월 2일 일요일에 드디어 최고 기온 30도를 찍었다. 뙤약볕 아래서 그날 하루 베를린은 자전거가 차지한 도시였다. 승전 탑으로 향하는 방사선 형 대로는 물론 베를린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까지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날 하루만은 브란덴부르크 주 동서남북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베를린으로 몰려드는 자전거 행렬에 양보한 것이다.

베를린 자전거 데모는 역사가 길다. 1977년에 처음 시작했다가 통일 이후 브란덴부르크 주로 확산했다. 브란덴부르크 주에서 각각 베를린 외곽 역까지 와서 자전거를 타고 베를린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도시 중심의 승전 탑 앞에서 모이는 것이다. 거기서 밤 늦게까지 환경 페스티벌이 벌어진다. 해마다 6월 첫 주 일요일, 세계환경의 날에 맞추어 개최된다. 동서남북의 모든 루트를 합치면 연장이 1000km가 넘는다.

그간 지지자들이 증가하여 어제처럼 화창한 날에는 십만 명 이상이 참가한다. 최대 기록은 25만 명. 이제는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도르트문트로 번졌고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2013년부터 주 전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연방 도로를 따라 슈투트가르트로 모인다.

해마다 모토를 세우는데 작년에는 “미세먼지 대신 자전거”였고 올해는 “자전거 교통 공간을 더 많이 할애하라!”였다. 베를린 녹색당은 수년 전부터 베를린을 자전거 중심의 도시로 바꾸려 애쓰고 있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여태 참가하지 못했다. 6월 초, 남편 생일을 맞아 늘 정원여행, 도시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더 늙기 전에 꼭 참가할 요량으로 여행을 포기했었는데 남편이 덜컥 병원에 입원해 버렸다. 엎친 데는 늘 덮치는 모양이다. 그날 아침에는 베를린에 연수하러 온 동포 한 분의 맹장이 터져 병원에 급히 입원, 수술을 받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래서 차량 통행이 심하게 통제된 날 병원 두 군데를 오가야 했다. 맹장 수술이 무사히 끝나 회복실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에서 나와 남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려고 버스정류장까지 갔는데 거리가 텅 빈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변에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서성대는 한 무리의 경찰 외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아, 참! 오늘 자전거 데모하는 날이지. 자전거 행렬을 기다리는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버스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택시를 잡으려 우왕좌왕하던 중 문자가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침 국제환경표준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베를린에 와 있는 한국의 연구원 한 명이 “감기몸살이 심해요. 열이 막 나고 그러는데 약을 어디서 사야 해요?”라고 물어 온 것이다. 요새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일요일이 되어 일반약국은 문을 안 열고 비상 약국이 구별로 지정되어 있는데 아픈 사람 더러 그리로 찾아가라 할 수 없으니 집에 들러 약을 챙겨 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집으로 갈 길이 막막했다. 콜택시 회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을 보니 주문이 쇄도하는 눈치였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고급 호텔에 들어가 이만저만하니 택시 좀 불러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30초 만에 택시가 왔다. 아침 일찍 맹장 수술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오느라 자전거 탈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어서 빨리 자전거 중심의 도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늦게 배운 자전거라 차량 통행이 잦은 대로에 타고 나가기는 아직 꺼려 지기 때문이다.

지난 5월 26일엔 유럽연합 의회에 내보낼 독일 대표를 뽑았는데 녹색당 지지율이 훌쩍 뛰어 10% 증가했다. 그 뿐이 아니다. 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쾰른 등의 대도시에서 녹색당이 최고의 득표율을 보여 제1당이 되었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기독교 사회연합이 죽 집권해왔던 보수의 본향 뮌헨에서조차 녹색당이 일등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15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 뮌헨에 사는 독일인 친구 하나가 그때 막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공직에 지원하고자 했다. 그런데 녹색 당원이어서 어렵다며 난색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것이 드디어 뮌헨에서도 녹색당이 득세한 것이다.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이래 지금까지 소위 말하는 '국민의 정당(Volkspartei)'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기독교 민주당(보수당)과 사민당(사회민주당)이 고난의 시기를 맞았다. 물론 기민당이 이번에도 의석 수를 가장 많이 차지하긴 했지만, 지지율 자체는 6.4 % 하락했다. 사민당은 11.5%의 하락률을 보여 이번 선거의 진정한 패배 당이 되었다. 여태 사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 배가 불러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사민당에게 실망을 넘어 배신감을 느낀다.”면서 차갑게 등을 돌린 것이다.

“이번에 무엇을 기준으로 투표했나”라는 설문조사에서 50% 이상이 “기후변화”라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기후변화 적응을 최우선의 정책으로 내 건 녹색당으로 표가 몰린 것이다. 기민당은 산업과 너무 친하다고 비판대에 올랐으며 그나마 메르켈 총리 때문에 여태 뽑아줬었는데 이제 메르켈 총리가 당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날 의사를 표했으니 더는 지지할 이유가 없다고 답한 사람들이 50%가 넘었다. 자동차 사업의 옹호, 폴크스바겐 스캔들, 기후변화에 대한 뜨뜻미지근한 정책 등이 유권자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세대별 지지율의 분포 상황이다. 기민당은 고령화 사회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지지층의 대부분이 75세 이상의 노인들임이 밝혀졌고 30세 이하의 청년층 지지율은 13%에 불과했다. 사민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태 양 대표당에 신의를 지켜왔던 지지자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다. 반면에 젊은이들은 확연히 녹색당을 지지하고 있다. 미래가 어떠할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결과다. 청년들은 당신들이 가고 나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지구인데 다 망쳐놓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 아직 산업진흥, 경제적 발전을 약속하는 뻔하디뻔한 기민당의 구호에 젊은이들은 분노하고 사회적 평등을 약속하는 사민당에게는 이제 거짓말 좀 그만하자 지겹지도 않나 라며 질책한다.

이제 녹색당이 대세임이 분명해졌으니 베를린이 자전거 중심의 도시가 될 날도 머지않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플래닛 B는 없다. 우리는 지구에서 자전거를 타겠다. [한국조경신문]

베를린 승전탑으로 향하는 자전거 행렬 [사진제공 ADFCBerlin]
베를린 승전탑으로 향하는 자전거 행렬 [사진제공 ADFC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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