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Times] ‘반지’였을까? 정말 ‘절대반지(the One Ring)’였을까? J.R.R.톨킨이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서 얘기하고픈 것이 말이다. 무려 7권의 책으로 구성된 이 판타지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뉴질랜드의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삼아 다시 태어난 이야기는 웅장하면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지금도 가슴에 울림이 남는 작품이다.

인간을 유혹하여 자신을 소유하는 자와 세상 모두를 파멸로 모는 위험한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 반지원정대가 꾸려지는데, 그 주인공인 반지 운반자는 마을 전체가 정원인 샤이어에 사는 프로도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프로도의 보호자이자 친구인 정원사 샘이다. 인정 많고 예리하지만 종종 반지의 유혹에 빠지고 마는 주인 프로도를 부모처럼 챙기고 보살피는 샘의 존재는 이야기 전반의 기둥이다. 우직하고 순진한 샘은 결연함과 단호함으로 어떤 위기에서도 프로도를 보호한다. 프로도의 배신(?)의 순간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작품을 보는 내내 부러운 건 프로도이다. 샘 같은 충직한 친구를 두었으니 그는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가! 그런데 이 작품에는 깜짝 놀랄 등장인물이 있다. 바로 나무의 모습을 한 나무의 수호신들이다. 2002년에 개봉된 ‘반지의 제왕 2부 : 두 개의 탑’에 멋지게 등장하는 이들은 헬름협곡 전투에서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댐을 부수어 악의 세력 사우론의 군대를 수장시킨다. 나무가 말을 하다니! 나무가 움직이다니! 나무가 작전을 짜고 전쟁을 한다?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이다. 나무와 식물을 작품에 등장시킨 작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톨킨처럼 적극적으로 나무에 인격을 주고 능동적 의지를 심고 행동을 입힌 작가는 없었다는 게 평론가들의 말이다.

전투 장면에서 나무의 수호신 엔트족의 활약이 통쾌하지만, 소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반지의 제왕’을 진정한 판타지로 만든 장면은 따로 있다. 소설의 2부 ‘두 개의 탑’에는 프로도의 친구들이 우연히 엔트족의 족장 나무수염을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장면이 나온다. 한밤중, 나무수염의 정원에 있는 나뭇잎과 줄기들이 황금빛과 초록빛을 내는 장면은 신비롭다. 바깥세상 소식을 들은 나무수염은 엔트족의 회의를 소집하고 2박 3일의 난상회의 끝에 악의 화신 사루만을 응징하기로 한다. 이 흥미롭고 환상적인 장면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반지원정대를 위태롭게 한 헬름협곡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적의 지원군인 엔트들이 참전 결정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사루만이 숲을 훼손한 데 대한 분노였다. 엔트들의 희생 또한 컸다. 그들은 사랑하는 식물들, 숲의 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태워지고 꺾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 반지원정대는 승리하여 절대반지는 완전히 파괴되고 아라곤의 나라도 회복된다. 아름다운 정원 샤이어도 온전한 행복과 풍요로 빛난다.

아라곤의 대관식은 오랜 세월 숨어 지내다가 암벽 눈 속에서 싹을 틔운 님로스 혈통의 나무를 왕궁 뜰에 심는 것으로 완성되고, 샤이어의 회복은 샘이 원정길에 요정에게서 받은 말로른나무 씨앗을 심어 가꾸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유욕이 초래한 악이 걷히면 나라도 마을도 제자리를 찾는다. 절대반지가 부추기는 욕망과 나무와 정원이 주는 풍요와 성숙은 이 작품에서 확연하게 대비된다. 악은 다름 아닌 정원의 파괴이다.

행복과 풍요의 중심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있고 정원이 있다. 그리고 정원의 어머니인 대지, 흙이 있다. 고대의 우화에 따르면 쿠라(Cura)여신이 강을 건너다가 점토를 발견하여 빚은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성서의 창세기에도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쿠라는 형상을 빚고 나서 지나가던 유피테르(Jupiter)에게 혼을 불어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하여 그 형상은 생기를 얻었다. 하지만 쿠라가 자신이 빚은 것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텔루스(Tellus, 땅의 여신)와 유피테르가 서로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나섰다. 급기야 그들은 사투르누스(Saturnus, 시간)에게 판결을 간청했고 재판관은 세 명의 신들을 모두 만족시켜 주었다. 이 형상이 죽으면 혼을 준 유피테르는 혼을 돌려받고, 육체를 빌려준 텔루스는 육체를 받아가고, 이 형상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제작자인 쿠라가 지배하도록 판결했다.

가장 중요한 이름에 대해서는 이 형상이 흙(humus)으로 만들어졌으니 호모(homo, 인간)로 부르도록 했다. 인간을 빚은 쿠라(Cura)여신의 ‘cura’는 영어단어 ‘care’의 어원이다. ‘걱정’, ‘근심’, ‘돌봄’과 ‘염려’를 뜻한다. 인간은 염려하는 존재이고 이 염려를 통해 비로소 성숙하고 완성된다. 게다가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는 자연스레 흙을 돌보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인간이 본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정원사의 마음으로 땅과 땅에 속한 것들을 걱정해주고 살뜰하게 돌보는 것이다. 마치 샘이 프로도를 돌보듯이.

‘반지의 제왕’의 샘이 프로도를 그리도 정성으로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원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염려와 헌신이 없었다면 절대반지는 파괴될 수 없었고, 세상은 절대악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의 회복은 왕궁(나라)이든 마을이든 나무와 숲으로 온다. 숲의 회복, 정원의 회복이 이 작품의 주제이다. 반지 운반자인 영웅 프로도는 죽음이 없는 땅, 발리노르로 떠난다. 친구들과의 애틋한 작별 이후 그가 탄 배는 전설 속 엘리시움(Elysium)으로 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은 정원에서 태어나 정원으로 돌아간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쿠라의 자식인 인간에게 흙이 고향이다. 절대반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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