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올해 소피아 여왕의 횡포가 유난히 심하다. 소피아 여왕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중북부 유럽에서 꽃샘추위를 그리 의인화하여 부르는 것이다. 차가운 소피아, 얼음장 같은 소피아…….

수년 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바로 꽃샘추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덴마크 동화작가 엔더슨이 <눈의 여왕>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디즈니 버전에선 엘사라는 이름을 부여했지만, 본명은 소피아로 알려졌다.

한국 꽃샘추위가 3월, 4월에 온다면 유럽의 꽃샘추위는 느지막이 5월 중순에야 온다. 이때는 식물이 이미 성장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중북부 유럽의 농부와 정원사, 정원애호가들에게 꽃샘추위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중부 유럽의 5월은 원래 매우 따뜻하다. 그러다가 북극의 냉기가 며칠 덮치는데 심한 경우 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서리가 온 누리를 덮기도 한다.

여기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농가 월령이 있다. 그에 따르면 꽃샘추위가 지나가야 봄이 ‘안정’되기 때문에 비로소 파종한다. 도시의 경우 소피아가 다녀가고 나서 5월 하순에야 정원이나 발코니에 <여름꽃>을 내다 심는다. 여름꽃이란 다름 아닌 일년초를 말하는데 여름에만 핀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상 여름이 시작되는 5월 말부터 볼 수 있으므로 그리 부르는 것이다. 정원박람회 등 특별한 경우에만 4월 중순에 꽃을 심는데, 심고 나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매일 관찰하며 필요에 따라 보호장치를 해 준다.

농가 월령에선 꽃샘추위가 찾아오는 날짜까지 확실히 알려준다.

소피아 여왕은 일단 신하 네 명을 먼저 내려보내 서곡을 울리는데 5월 11일에는 마메르투스, 12일에는 판크라티우스, 13일에는 세르바티우스, 14일에는 보니파티우스가 다녀간다. 마지막으로 5월 15일에 소피아 여왕이 얼음 마차를 타고 나타나 세상을 냉동시키고 가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4명 신하도 그렇고 소피아도 그렇고 모두 기독교 성인들의 이름을 빌었다. 말하자면 기독교가 도입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를 종교적으로 재해석한 것일 텐데 네 명의 신하를 <봄을 망치는 못된 형제들>이라 한다거나 심장이 얼음장 같은 소피아라고 하는 것을 보면 성인에 대한 종교적 숭배보다는 농사가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일기 측정이 시작된 이래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5월에 최소 2일 정도 실제로 서리가 내림이 확인되었다. 농가 월령이 맞는다는 뜻일 텐데 문제는 여러 해전부터 매우 들쑥날쑥해져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해마다 꼬박꼬박 다녀가던 소피아 여왕이 언제부턴가 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늦어도 15세기부터 여태까지 수백 년 동안 장기 집권했으니 연로하고 피로할 것이다. 그래서 은퇴했나? 이러면서 안심할라치면 다시 쌩하니 찬 바람을 몰고 나타난다. 아니면 때아니게 4월에 나타나기도 한다. 작년에는 걸렀었다. 그 덕에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되어 10월까지 뜨겁고 건조한 여름이 지속했다. 한 해를 걸러서 그런지 올해 5월 초에 일찌감치 나타난 소피아 여왕은 떠날 줄 모르고 서성이고 있다. 하일브론의 연방정원박람회를 찾아갔던 날 종일 찬비가 내렸다. 이제 5월 중순을 넘어 하순으로 접어드는데 아직도 새벽이나 밤에는 겨울옷을 입어야 한다. 제발 이제 좀 하야했으면 좋겠다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일 다시 하일브론 정원박람회에 가기로 되어있는데 일기예보에 따르면 최고 기온이 18도, 비 내릴 확률이 90퍼센트라고 한다. 또 우산을 쓰고 덜덜 떨면서 다녀야 하나 보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1200~1300년대 사이에 유럽이 매우 따뜻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쪽의 추운 나라에서도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다음 15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수백 년 동안 전반적으로 추웠다고 한다. 이 시기를 소빙하기라고 하는데 아마 이때 눈의 여왕 내지는 겨울왕국이라는 이야기가 나타난 것 같다. 겨울이 몹시 춥고 내내 눈이 쌓여 있던 것은 물론 여름에는 선선하고 비가 많이 왔다. 자연히 식물 성장기가 짧아져 농부들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늦게 파종하면 수확량이 줄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일찍 파종하면 소피아 여왕이 다 냉동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고난의 수 세기였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작가는 이에 착안하여 몇 년 동안 지속하는 무시무시한 겨울을 설정한 듯하다.

소빙하기가 끝나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식물의 성장기가 점점 길어져 정원의 전성기가 왔다. 그러다가 21세기에 접어들며 소피아 여왕이 늙어 노망든 탓인지 아니면 기후변화 탓인지 엄청나게 갈팡질팡하고 있다.

재작년 2017년에도 그랬었다. 4월, 사과꽃이 한창 피던 무렵 며칠 갑자기 찬 바람이 모질게 불고 서리가 내렸다. 그때 사과꽃이 다 떨어져서 가을에 결국 사과 흉년이 들었다. 친구의 정원에 아주 오래된, 훌쩍 큰 사과나무가 한 그루 구부정하게 서 있는데 보기와는 달리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열리기 때문에 해마다 가을이면 향기로운 사과를 한 바구니씩 얻어먹곤 했다. 재작년에는 바구니 하나 분량밖에는 수확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친구라서 그 사과로 효소를 만들어 양념으로 쓰기에 나눠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그해 5월 아헨 근교로 낙향하신 스승님댁에 놀러 갔었는데 정원의 배나무, 체리 나무 꽃이 죄다 떨어졌다면서 올해는 배도 체리도 끝이라고 울상을 하셨다. 스승님을 모시고 헤르만스호프라는 정원이랑 아헨에 있는 카롤루스 대제의 약초원 등을 두루 보러 다녔다. 우산을 쓰고 오슬오슬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해는 여름 내내 서늘한 비가 내렸다. 베를린에서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해이기도 한데 여름 날씨가 엉망이라 방문객 숫자가 예상에 미치지 못해 적자를 봤다.

이러다간 올해 하일브론 연방정원박람회도 슬프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다행히 사과꽃은 제대로 피어 열매가 영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마다 조마조마하며 사는 것도 못 할 일 아닌가. 소피아 여왕을 영구히 하야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촛불 집회를 열어야 하나? 그러다 문득, 이런 장애와 어려움이 있음으로써 여름에 피는 꽃과 가을에 여무는 알곡이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특한 생각을 해 본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위로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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