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

열기 가득한 여름 밤, 도로위에 갇혀 사는 꿋꿋한 가로수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자네! 왜 그렇게 시무룩한가? 나를 보게나. 이 답답한 곳에 살면서도 무성한 이파리를 뽐내지 않는가? 움직이지도 못하는 내가 말일세. 누가 나를 공격해도 도망갈 수 없고 산과 숲이 그리워도 다시 그 곳으로 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신세지만,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줄줄이 스치는 가로수들의 울림은 웅장한 합창이 되어 내 마음을 두드렸다.

그들의 초대를 기꺼워하며 한 걸음씩 그들 속으로, 식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나려고 굳이 산으로 가지 않아도 그들은 도처에 있다. 보도블록 틈새에서 그들은 명랑하게 재잘댄다. 집에도 사무실에도 카페에도 그들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곤 버젓하게 보란 듯이 살아간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내게 관심을 보였다. 윙크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식물들의 끈질긴 유혹에 못 이겨 그들을 알아가기로 했다. 사랑하는 이의 몸짓과 표정까지도 읽어내려는 간절함으로 식물에 관한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5년이 지나면서 그들에 관한 보고서는 사랑편지로 바뀌어갔고 이제는 그들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내게 말 걸어 준지 17년 만에 그들을, 그들에 대한 나의 열렬한 사모와 경외의 정을 드디어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했던가! 알아갈수록 난해했던 그들과 온전한 만남에 도달했다는 이 벅참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평화와 안식, 나눔과 보답, 변신과 장수, 균형과 항상성, 인내와 반격… 무한한 생명력으로 지구를 점령하고 살면서 모든 생명체들의 원천이 되어주는 그들을 말이다. 얼마 전 말 걸어 준 가로수에게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 나, 이제 식물처럼 살기로 했어!”

‘식물처럼 살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열등감에다 짜증에다 두려움에 조급함으로 엉킨 내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더니, 다소 엉뚱하게 여겨지는 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분들을 만나는 행운까지 가져다 주었다. 본래 노마드인 식물은 친구가 된 나도 이리저리 옮겨다 주었다. 그래서 책이 나오고 나서는 민들레 홀씨처럼 폴폴 날아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다니다가 이제는 조경신문 가족들께 인사를 드리게 된 거다. 반갑고 감사한 일이다.

‘장자(莊子)’에 보면 성인(聖人)과 도(道)와 큰 나무[大樹]는 같은 부류라고 한다. 도와 큰 나무는 한 곳에 뿌리박고 정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박고 정착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道)가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무는, 식물은, 얼핏 보면 한 곳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그들은 위로 위로 하늘을 향해 움직이고 아래로는 땅 깊은 곳에서 유영한다. 마음과 생각의 자유로움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땅 속 씨앗은 온 우주로 뻗어나갈 꿈을 한 시도 잊지 않고, 잎들은 꽃을 피워 풍성한 잔치를 벌일 생각으로 바쁘다. 꽃들이 태어나면 온갖 향기를 뿜어내며 중매쟁이들을 유혹한다. 뿐이랴, 영차 영차 키워낸 씨앗들은 엄마 품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본다. 뻣뻣한 원칙과 주체성을 고수하고 있으면 식물은 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성인과 도와 짝을 이루어 자연스레 산다. 이러한 유연함은 생명의 증거이다. 부드러움은 살아가는 것이고 딱딱함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 또한 ‘도덕경’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을 지낸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이란 별명이 붙은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 (Jacques Attali)는 그의 역작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역사 발전은 정착생활 보다는 오히려 유목생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계화는 상업적 세계화와 산업적 세계화였고, 특히 21세기에 이루어진 세 번째 세계화를 통해 인류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노마드의 역사’라고 정의했다. 동물들은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창공을 비행하며 이주에 능한 철새조차도 알고 보면 조상들이 거쳤던 곳을 그대로 답사하는 것이다. 물결을 거스르며 인고의 여행을 하는 연어들 또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동물들은 움직이는 것 같지만 뿌리가 있다. 그래서 그런 속성을 ‘귀소본능’이라고 부른다.

식물은 어떤가? 먼 곳으로 씨앗을 내보내는 식물의 모험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코바와 크림파이의 재료로 인기 만점인 코코넛 열매는 물 위에 떠서 최소한 석 달 이상 살아갈 수 있으며 바람과 해류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나 수천 킬로미터까지 이동할 수 있다. 그래서 전 세계에 걸쳐 자라는 코코넛의 원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어디에서나 뿌리를 내려 꿋꿋하게 살아내는 식물의 노마드 기질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노마드 인류가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면 노마드 식물은 진정한 지구의 주인일 것이다. 이 지구의 성인(聖人)을 친구로 둔 조경가족들과 말문을 트게 되어 영광이다.

*최문형의 식물 노마드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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