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조경과 환경계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독일의 생태도시 프라이부르크에 다녀온다. 그중 리젤펠드Rieselfeld라는 이름의 생태단지가 있다. 예전에 오수를 내다 뿌리고 토양층으로 하여금 이를 정화하게 했던 너른 들판이 있었는데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개발하면서 들어선 것이 생태단지 리젤펠트다.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에서 트램 5호선을 타고 약 25분 뒤에 <숄 남매 플라츠>에서 내리면 된다. 트램에서 내리면 바로 코앞에 정사각형의 소광장이 보인다. 광장 좌측으로는 슈퍼가, 맞은편엔 주차장이 보이고 등 뒤와 오른 손 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간다. 극히 평범한 교차로 소광장이며 리젤펠트 단지로 들어가는 진입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 바닥이 좀 심상치 않다. 몇 해 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처음 발견한 사실이다. 바닥 자체는 회색 모자이크로 페이빙 되어 있는데 누군가 그 위에 흰 A4 용지를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종이가 아니고 희게 물들인 콘크리트 포장석이었다. 사방 40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의미가 있겠구나 싶어 두리번거리며 안내판을 찾다가 문득 아, 참 이곳 정류장 이름이 <숄 남매 플라츠>였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흰 종이 같은 포장석은... 불현듯 그 의미가 깨달아지며 전율이 왔다. 나치스 정권 말기에 저항 전단지를 뿌리다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숄 남매. 그들을 기리는 곳이 틀림없어 보였다.

숄 남매는 1943년 2월 18일에 체포되어 게슈타포에게 모진 심문을 받고 2월 22일 재판에 붙여져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날 바로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20세기 중반이었음에도 끔찍하게 단두대로 처형했다.

당시 한스와 소피 남매는 뮌헨 대학 재학생이었다. 오빠 한스는 의대생이었고 여동생 소피는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42년 이차대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스 숄과 그의 친구 알렉산더 슈모렐이 <백장미단>이라는 저항운동모임을 결성했고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피도 합류했다. 그들은 나치스 정권의 전복을 염원하며 과격한 문구가 담긴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다른 대학은 물론 군대 내부에도 잠입하여 반 나치스 파와의 접선을 꾀하는 등 격렬하게 움직였다. 영국으로도 전단지가 반출되었는데 영국군에서 이를 대량 인쇄하여 전투기에 싣고 독일 땅에 뿌렸다. BBC에서도 방송으로 내보내는 등 해외의 반향이 커지자 게슈타포는 <백장미단>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943년 1월 18일 학교 교정에서 6번째 전단지를 배포하던 한스와 소피 남매는 그만 수위에게 들키고 만다. 열렬한 나치스였던 수위는 대학의 법률담당과 학장에게 신고했고 더욱 열렬한 나치스였던 학장은 남매를 게슈타포에게 넘겼다. 이들이 끌려갈 때 전교생들이 모여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게슈타포에게 갈채와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수위는 상금을 받고 진급했다.

전쟁이 끝난 뒤 수위는 나치 재판에서 오년 형을 받았다. 형을 살고 나온 뒤 연금까지 받아가며 1964년 까지 목숨을 부지했다. 제자들을 잔인하게 처형대로 몰고 간 스승, 발터 뷔스트 학장은 삼 년형을 받고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나 만 92세가 되도록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어제, 2월 18일 리젤펠트에 대한 문의가 들어 와 자료와 사진들을 정리하던 중 숄 남매 광장 사진과 다시 만났다. 우연이다 싶게 76년 전 숄 남매가 체포되었던 바로 그 날이었다. 당시 그 광장에 서서 <누가 설계했을까? 단순한 디자인에서 나오는 힘이 엄청나다.>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던 것이 일행의 뒤를 바삐 따라가 함께 리젤펠트를 돌아보던 중 그 생각을 어느 하수구엔가 빠뜨렸던 것 같다. 다시 궁금해졌다. 검색을 해 보니 만프레드 엠메네거-칸츨러Manfred Emmenegger-Kanzler(1953~) 라는 조형예술가의 작품이었다. 그에게 간략히 메일을 보내 인터뷰를 청했더니 저녁 때 전화가 왔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1997년 프라이부르크 시는 리젤펠트를 개발하면서 도시 설계의 가닥이 잡혀가자 진입 공간 디자인 현상 공모를 내보냈다. 숄 남매의 저항운동을 상징하는 <바닥 그림>을 요구했고 이를 <생태적 사고>와 접목시켜달라고 했다. 그 결과 엠메네거-칸츨러가 제시한 <전단지 콘셉트>가 당선되었다. 얼핏 생태와 무관해 보이지만 작품에서 나오는 힘을 아무도 거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숄 남매의 저항운동과 생태도시가 무슨 관련이 있기에 프라이부르크 시는 생태적 사고思考와의 접목을 요구했고 왜 아무런 생태적 기미가 안 보이는 작품이 당선되었을까. 우선 사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부터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리고 생태적 사고는 저항정신과 큰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싶다. 코드가 같다. 자연보호운동 자체가 저항정신에서 출발했다. 무차별 자본주의의 독재에 대한, 성장지상주의의 군림에 대한 저항이었다.

<봄의 침묵>이란 책이 있다. 자연보호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되는 책이다. 이 책을 집필한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1907-1964) 여사는 자본주의, 특히 화학 산업의 횡포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엠메네거-칸츨러는 바로 그 정신을 광장에 보란 듯이 뿌려 놓은 것이다.

한스와 소피 숄 남매가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서 후일 자연보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면 – 틀림없이 그리했을 것이다 –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며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프라이부르크 리젤펠트 숄 남매 광장. 디자인 만프레드 엠메네거-칸츨러. [사진제공: 고정희]
프라이부르크 리젤펠트 숄 남매 광장. 디자인 만프레드 엠메네거-칸츨러. [사진제공: 고정희]
소피 숄 [크레딧: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소피 숄 [크레딧: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한스 숄 [크레딧: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한스 숄 [크레딧: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만프레드 엠메네거-칸츨러 작업 중. [크레딧: Emmenegger-Kanzler]
만프레드 엠메네거-칸츨러 작업 중. [크레딧: Emmenegger-Kanzler]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