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고정희(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한국이 그립지 않은 때가 없지만 그 그리움이 넘칠 때면 이따금 10 유로를 지불하고 광고없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볼 수 있는 사이트에 들어간다. 거기서 드라마도 보고 새로 나온 노래도 들으며 울고 웃는다. 그런데 요즘 노래 가사나 드라마 대사 중에 “지켜줄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걸 느낀다. 낯설지만 듣기 좋다. 우리 젊은 시절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요즘은 사랑해~ 대신 지켜줄게! 그러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방식이 진보한 것 같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사계절이 뚜렷하고 경관이 수려하며 자연을 매우 사랑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앵무새처럼 대답했었다. 처음엔 말을 못하니까 한국 소개 책자 독일어판에 있는 그대로 외워서 얘기했다. 학교에서도 그리 배웠기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서슴없이, 자부심에 차서 그리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연을 매우 사랑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란 말이 쏙 들어갔다. “자연을 매우 사랑하지만 지켜내지 못하는 슬픈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지키지 못하는 사랑 – 아 이 얼마나 슬픈가. 드라마에서 싫도록 우려먹을 만큼 슬픈 소재다. 한국인들은 슬픈 얘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연보호를 등한시 하게 되었나? 드라마 탓인가? 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우리말의 의미를 조금 더 분석해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긴다.”는 뜻과 다름이 없다. 지극히 수동적이다. 수려한 경관에 정자를 세워 놓고 거기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흥을 돋우는 것이 아마도 전형적인 자연 사랑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멋져요. 그게 자연 사랑이지 다른 것도 있나요?” 이런 질문을 던질 법하다. 물론 다른 사랑도 있다. 드라마 주인공들의 말대로 지켜낼 줄 아는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산을 사랑하여 즐겨 산에 오른다. 각자 좋아하는 산이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날 불도저가 나타나 그 사랑한다는 산을 범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다른 산으로 바꿔 탈까? 대상이 산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누가 범하거나 해코지한다면 가만히 보고 있을까? 요즘은 말끝마다 “지켜준다”고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비싸게 구입한 등산 스틱이라도 옆구리에 끼고 불도저를 향해 냅다 돌진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지켜낼 수 없다.

사람은 의식이 있고 감정이 있으므로 상대방의 사랑에 어떻게든 반응한다. 나도 사랑해~ 또는 나도 너를 지켜줄게! 이러면 해피엔드가 된다. 그런데 자연은 사람들의 일방적인 구애와 배신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사랑해~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불도저를 몰고 와서 내장을 파헤쳐도 아무 저항도 못한다. 말 못하는 자연의 입장을 이제 사람이 대변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선비들이 매일처럼 술잔을 기울이며 취해있을 때 실학자 홍만선 선생은 땀 뻘뻘 흘리며 답사하고 관찰하여 <산림경제>라는 책을 집필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도 비슷한 책이 출판된 바 있다. 아쉽게도 집필에 그친 홍만선 선생의 저서와는 달리 독일 책은 출판되어 꾸준히 읽혔다. 저자는 칼 폰 칼로비츠 남작인데 당시 작센 왕국의 은광 책임자로 평생 종사했던 인물이었다. 작센은 은 산출지로 유명한 고장이어서 그 덕에 수도 드레스덴이 화려한 바로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은 채굴을 책임지고 있던 칼로비츠 남작은 채굴로 인해 파괴되는 산림에 더 관심이 많았다. 1713년, 30여년 재직기간 동안 연구한 결과를 정리하여 <산림경제학 Sylvatica eoconomica>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여기서 그는 “나무가 자라는 속도 이상으로 벌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말이 쉽지 벌목 속도와 성장 속도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벌목하기 전에 종자를 채취하여 묘목을 만들고, 수목재배원에서 육성하여 숲을 먼저 조성해 두어야한다.”고 했고 이를 몸소 실천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지속가능성이며 자연자원 총량보존의 원칙이다. 퍼쓰기 이전에 먼저 보충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칼로비츠 남작은 지속가능성이란 개념을 발명한 인물로, 자연자원 총량보존의 원칙을 수립하고 그 방법론을 제시한 인물로 널리 기려진다. 무관심 속에 묻혀버린 홍만선 선생의 가르침과는 달리 칼로비츠의 방법론은 계속 실천되어 왔으며 수백 년이 지난 1976년 자연자원 총량보존의 원칙(No Net Loss) 또는 자연침해 조정제도(Regulation of Intervention)라는 이름으로 국가자연보호정책의 기반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독일인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내심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매달리고 악착같이 지켜낸다. 허허, 어차피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도 없거늘 그대들은 왜 그리 물物에 집착하는가?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는 없지만 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한결같은 독일인들의 대답이며 독일인들의 사랑방식이다. 사랑을 후세에까지 물려주려 한다. 전혀 낭만적이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다. 그저 실속 있을 뿐이다.

 

* 고정희신잡은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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