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경 강릉원주대 교수
김태경 강릉원주대 교수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난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오랜 유치경쟁과 준비기간에 비해 경기일정이 짧아서인지 허무한 느낌도 없지는 않지만 소치에 비하면 훨씬 뿌듯하다. 소치에서의 치열한 경쟁뒤에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러시아선수들에 대한 메달 취소는 마치 선수들을 넘어 러시아 전체가 약물에 중독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약물의 흔적을 찾아올라가 보니 푸틴의 그림자에 까지 닿아 있었으니... 아무튼 그 대가로 평창에서의 입장식에서는 러시아국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자체가 국가적인 망신이었다. 소치가 수치로... 요즘의 우리는 어떤가? 모여고의 쌍둥이 자매가 러시아선수단 못지 않은 비행에 뭇매를 맞았다. 문제를 읽지 않아도 답을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아버지의 빗나간 사랑 때문에 두 자매의 앞길은 더욱 험난한 가시밭길이 될 듯하다. 소치는 특정하지 못하는 단체의 문제이지만 이 소녀들은 완전한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냉정히 보면 그들 앞에 있을 험난함의 정도는 모질어야 한다. 어쩌면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조차 끊어질 것이지만 말이다.

전혀 다른 이 두 개의 사건이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일으킨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경쟁의 장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소수가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메달을 따고 자식의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이야 누군들 없겠고, 상황만 된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인간의 조직 다시말해 사회는 약속과 그것을 지키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역주행에 의해 약속을 지킨 선량한 운전자와 그의 가족이 비탄에 빠지고, 세상을 원망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 빗나간 사랑의 결과가 성공했다고 선수들과 딸들에게 정말로 평탄한 앞날을 만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텐데 그렇다면 그런 행위들이 결국 자신들의 허영심을 채우려는 욕망이었을 뿐이다.

참가하는데에 의의가 있다는 올림픽의 정신을 훼손시킨 소치대회로 인하여 지구촌의 축제는 도핑테스트 기술을 개발하는 경쟁의 장이 되었다. 이럴거면 축제는 왜 하는가? 축제를 의미하는 carnival은 라틴어의 caro(고기)와 levara(제거)의 합성어로 카톨릭 국가에서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하므로 그전에 고기를 먹어치운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 기간동안은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난장이 될 것이지만 소치는 그야말로 난장판에 지나지 않았다.

서로간의 소통과 축제가 끝난 후 일상으로의 건강한 회귀라는 매우 훌륭한 기능 때문에 모든 민족과 문화에 필수적인 도구였는데 말이다. 소치에서 벌어진 금지약물 복용은 올림픽 정신을 손상시킨 것은 물론 축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낮은 수준의 행위였던 것이다. 이 순간 조형예술의 최고봉인 미켈란젤로 그리고 조형예술의 최고작인 다비드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해본다.

1501년에 시작하여 1504년에 완성했다고 하니 시간만으로도 대작임에 틀림없다. 다비드(david) 즉, 다윗은 구약성서 사무엘서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을 죽인 16세의 소년으로 미켈란젤로는 그를 싸움 직전의 긴장된 순간으로 표현했다. 망태를 메고 강렬한 눈빛으로 옆을 응시하면서 돌을 쥐고 막 던지려는 순간의 청년상이다. 고대의 조각상들이 올림픽의 우승자를 모델로 했고 르네쌍스는 고대로의 회귀이니 그의 다비드상 역시 고대 올림픽 우승자의 전형을 잇고 있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 수 있겠다.

근대올림픽을 시작한 쿠베르탱이 올림픽은 “육체의 기쁨, 미와 교양, 가정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근로, 이상 3가지이다.”라고 주장한 것까지 연장해봐도 올림픽에 참가했던 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그것의 경연장이었다. 이처럼 자그마한 선함이 또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르네쌍스라는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한 것이다. 과거 지구촌의 축제에는 이상한 약품도, 빗나간 사랑도 없었기 때문에 이상한 결과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음으로써 약에 취한 디스코볼로스(미론작품)도 눈이 풀린 다비드상도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의 조경학과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내일의 건강한 조경인이 되길 바라면서 환경조경대전이라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한국조경신문의 얼마 전 기사에는 2018년 환경조경대전의 결과에 대해 ‘싹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심사위원을 비롯하여 관계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차이가 컸던가? 아니, 작품의 수준은 언급하지 말자. 과연 그래야만 했는가?

그렇지 않아도 건설분야의 예산, 학생수, 학생들의 관심도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후퇴의 징후가 뚜렷하여 어떻게 하면 이들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 아니 쇠퇴의 속도라도 늦출 수는 없는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싹쓸이라!... 싹쓸은 곳에서는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축제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겠지만 그 외의 대학들에게는 상실감과 박탈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에게는 더욱더...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던 소치와 모여고에서 그들을 지켜봤던 사람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우린 누구를 상대로 도핑테스트를 해야 하고, 문제가 있다면 다음 대전의 입장식에서 어떤 깃발을 들게 할 것인가? 스마트폰을 검사할 수는 없는가? 등등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하게 채우는 통에 한동안 원망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었다. 대회의 권위는 떨어졌지만 이것보다 큰 걱정은 학생들이 이 대회를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점이다.

우리보다 큰 분야에서 조경을 보는 눈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평이 파다하다. 손바닥만한 세상에서 이땅 저땅 나눠놓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한심한 지경이라는 것이다. 한마음 한뜻으로도 그들과의 대적이 힘겨운데 또 이렇게 불신을 키우는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 것인가?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우리의 잔치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그런 대통령과 그런 아버지를 두지 못한 것에 대해 대비를 시켜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올림픽의 정신을 강요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수상작을 발표한 시간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니 죽은 자식 무엇을 만지는 것은 아닌지, 혹은 아물어가는 상처를 헤집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앞으로 다가올 시간과 공간의 주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을 것 같아 용서를 구하는 심정이라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이글을 쓰게 했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 상처가 회복할 수 없는 병으로 커져서도 안 되고 우린 다시 축제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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