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보길도 고산 윤선도 원림
[그곳에 가면] 보길도 고산 윤선도 원림
  • 지재호 기자
  • 승인 2018.12.12
  • 호수 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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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지난 밤 눈 갠 후에 사방의 경치가 달라졌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에는 넓고 넓은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계가 아니로다

- <어부사시사> 冬詞(동사) 中

 

[Landscape Times 지재호 기자]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지은 어부사시사 일부인 동사는 165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나이 65세로 벼슬을 뒤로하고 전남 보길도에 들어가 살고 있던 중이다.

휘몰아치는 붕당정치 속에서 유배 생활을 이어간 고산은 서울 출생이지만 본관은 해남이다.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의 양자로 8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해남으로 내려갔다.

광해군 8년 성균관유생들의 당시 집권세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며 이로 인해 함경도로 유배된다. 1634년 모함으로 현감에서 파직된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 왕이 항복하고 적에게 화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끄럽게 생각한 고산은 제주로 향하던 중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낙서재   [사진 지재호 기자]
낙서재 [사진 지재호 기자]

 

부용동(芙蓉洞)

고산이 보길도에 정착하면서 일대를 부용동이라 명명하고 격자봉 아래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었다. 이후 십이정각과 동천석실, 회수당, 세연정을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난이 정리되면서 서울로 향한 고산이 왕에게 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으로 귀양살이를 해야 했고 1년 뒤 풀려나 보길도로 들어가 10년 동안 섬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금쇄동의 산수자연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정치사는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이 전부라 할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출신으로 서인 세력과는 견주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맞선 결과라 할 수 있다.

 

낙서재 앞 귀암은 최근에 발굴된 것으로 고산이 달빛을 보며 명상을 즐길 때 이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낙서재 앞 귀암은 최근에 발굴된 것으로 고산이 달빛을 보며 명상을 즐길 때 이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낙서재(樂書齋)

고산이 거처로 삼은 낙서재는 격자봉에 올라 주산의 형국을 파악하고 그 혈맥이 세 차례나 꺽여 내려오는 곳에 커다란 바위를 소은병이라 명명하고 그 아래에 터를 잡았다.

풍수지리에 밝은 고산이 격자봉의 혈맥을 찾아 길지에 낙서재 터를 잡은 것이다. 낙서재는 독서를 즐기며 학문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고산은 이곳에서 많은 책을 쌓아 두고 독서하며 자제들을 가르쳤다.

최근 낙서재 마당 북쪽에 고산이 달구경하던 귀암이 발견돼 남쪽의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됐다.

 

동천석실에서는 격자봉 정상은 물론 부용동 전체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여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동천석실에서는 격자봉 정상은 물론 부용동 전체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탁 트여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한 평 정도 크기의 서재는 아늑하기까지 하다.  [사진 지재호 기자]
한 평 정도 크기의 서재는 아늑하기까지 하다. [사진 지재호 기자]

 

동천석실(洞天石室)

낙서재 정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동천석실은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해서 정자를 지었다.

맨 위 꼭대기 서재에서는 책을 읽거나 시를 읊었다고 하고, 그 아래에는 1평 정도의 작은 공간의 침실을 두고 있다.

 

세연정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사진 지재호 기자]
세연정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사진 지재호 기자]

 

세연정은 조선시대 정원을 대표하는 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세연정은 조선시대 정원을 대표하는 정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진 지재호 기자]

 

세연정(洗然亭)

가장 공들여 조성한 곳으로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에 인공으로 물길을 조성하면서 정자와 대를 지어 경관을 즐겼던 곳이다. 연못은 꼭지와 방지로 구성되는데 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는 큰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고 방지 한 켠에 섬을 만들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의 동쪽 물가에는 돌로 된 네모진 두 개를 나란히 꾸며 놓았는데 이곳은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라고 한다.

도움 : 이태겸 서울시립대 도시과학연구원 조경학박사

[한국조경신문]

 

지재호 기자
지재호 기자 cjh@latimes.kr 지재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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