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으로 올라가고 있는 뚜벅이들.  [사진 지재호 기자]
면앙정으로 올라가고 있는 뚜벅이들. [사진 지재호 기자]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멀리 떨쳐 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도 없이 넓은 들판에서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 곳에 움츠려 무더기를 벌여 놓은 듯하고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혀 놓았으니,
너럭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얹어 놓아
마치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구나.

-송순(宋純) 면앙정가 중

[Landscape Times 지재호 기자] 기억에 없는 역사를 듣고 체감하기 위해 한국조경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협회가 후원하는 제63차 뚜벅이 여행은 지난 14일 예향의 고장이자 가사문학의 산실인 전남 담양을 찾았다.

백은정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 뚜벅이들.  [사진 지재호 기자]
백은정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 뚜벅이들. [사진 지재호 기자]
면앙정에서  [사진 지재호 기자]
면앙정에서 [사진 지재호 기자]

 

호남가사문학의 산실 ‘면앙정’

면앙정가단의 창설자이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인 송순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1533년 김안로의 탄핵으로 출생지인 담양으로 귀향해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살았다.

이후 1550년 대사헌 이조참판이 됐으나 이기일파 등에 의해 충북 서천으로 귀양 후 1552년 선산도호부사가 돼 면앙정을 증축했다. 1533년에 지어진 면앙정은 올해로 485년이 됐다.

건물은 정념 3칸과 측면 2칸으로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했다. 골기와의 팔작지붕에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활주가 받치고 있다.

현재 건물은 이미 여러 차례 보수를 했고 1979년과 2004년에 지붕을 새로 올렸다고 한다.

송순은 퇴계 이황 선생 등과 한문과 국사를 논했고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임억령 등 후학을 길러냈다.

송순의 ‘면앙정가’는 면앙정 주변 산수 경개와 계절 변화에 따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훗날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식영정으로 향하는 길.  [사진 지재호 기자]
식영정으로 향하는 길. [사진 지재호 기자]

 

식영정 아래에 위치한 부용당(좌측)과 서하당(우측).   [사진 지재호 기자]
식영정 아래에 위치한 부용당(좌측)과 서하당(우측). [사진 지재호 기자]

 

부용당 앞에 서 있는 송강정철가사의 터 비.   [사진 지재호 기자]
부용당 앞에 서 있는 송강정철가사의 터 비. [사진 지재호 기자]

 

그림자가 쉬는 곳 ‘식영정’

식영정은 송순의 후학 중 임억령의 사위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1560년에 성산자락에 지은 곳이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이에 대한 풀이는 ‘식영정기’에 담겨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꼭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다.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화옹과 함께 어울려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다”라고.

이 곳에는 수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송순을 비롯해 송순의 후학인 정철, 기대승, 고경명, 그리고 김윤제, 김인후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임억령과 김성원, 정철, 고경명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릴 정도였다.

또한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의 대표로 잘 알려진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은 성산 주변의 풍경과 그 안에서 변화되는 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정철의 ‘성산별곡’은 스승인 송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쇄원 전경.  [사진 지재호 기자]
소쇄원 전경. [사진 지재호 기자]

 

제월당 편액을 바라보고 있는 뚜벅이.  [사진 지재호 기자]
제월당 편액을 바라보고 있는 뚜벅이. [사진 지재호 기자]

 

계류를 떠 받치고 있는 담장은 오랜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기개가 높다.  [사진 지재호 기자]
계류를 떠 받치고 있는 담장은 오랜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기개가 높다. [사진 지재호 기자]

 

조선 최고의 별서정원 ‘소쇄원’

1530년 조광조의 제자인 소쇄옹 양산보가 건립한 원우(園宇)인 소쇄원은 조선시대 최고의 별서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제월당과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고암정사 등 10여 동으로, 이 중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의 광풍각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광풍각 아래는 높이 2~3미터 정도의 계곡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커다란 바위를 따라 물길이 조성돼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광풍각과 제월당의 편액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주자학의 대가였던 우암 송시열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그 위로 계류 위를 지나는 담장이 눈에 든다. 보기에 위태로운 돌덩이로 담장을 버티고 있지만 48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이 담장에는 오곡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담 아래 뚫린 구멍으로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옥헌에서 단체 사진.  [사진 지재호 기자]
명옥헌에서 단체 사진. [사진 지재호 기자]

 

끝으로 송순의 제자 중 백호 임제(林悌)라는 인물의 재치있는 일화로 마무리한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문장과 시에 능통한 천재이자 현 시대의 카사노바였던 그는 각종 염문이 나돌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다.

그 중 그가 자칫 죽을 뻔 했던 일화가 으뜸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여인과 하룻밤을 지낸 임제는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임제는 여인의 남편에게 “죽을 때 죽더라도 시 한수 쓰고 죽겠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가 쓴 시는 이렇다.

 

‘어젯밤에 장안에서 술이 취해 돌아오니

어여쁜 한 가지 꽃이 예쁘게 피었구나.

누가 이 번화한 땅에 꽃을 심었는가.

꽃을 심은 자가 나쁜가.

꽃을 꺾은 자가 나쁜가.’

 

임제는 결국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황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 한 여인의 순고한 사랑을 지키기 위한 시 등 당대의 로맨티스트의 모습을 지닌 일화 등은 500여년의 시간을 앞 둔 현세에서는 감동과 서정적 그리움으로 대표되고 있다.

한국조경신문에서 주최하는 뚜벅이 여행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진행되며 8월은 쉬고 9월에 이어진다. 신청은 동산바치몰(www.dongsanbachi.com)에서 가능하다.

[한국조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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