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경 강릉원주대 교수
김태경 강릉원주대 교수

[Landscape Times] ‘참패’, ‘완승’이라는 말로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었던 6‧13지방선거가 끝났다. 진보와 보수의 대표임을 자처했던 두 당의 성적표라고 생각하면 진보의 완벽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씁쓸하다.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라 보수의 패배 때문은 아니다. 당서(唐書)에 쓰였듯이 전쟁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승패는 늘 상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모든 경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선거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 씁쓸함은 한 쪽으로의 쏠림현상에서 나온 것이다. 날개의 한 쪽이 조금만 크거나 작아도 나는 것이 힘들텐데 지금의 성적표는 한 쪽이 기능을 상실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래서야 어떻게 날아오를까? 더구나 국가의 살림살이는 장거리 비행일텐데... 날지 못한다면 모두가 패배자가 아닌가! 이 순간 ‘중용(中庸)’이라는 덕목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성에 대한 가치이므로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균형(balance)’이라는 개념을 생각한 자사(子思)의 철학에 고개를 숙이고 싶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뛰는 것이 이유 없이 좋던 시절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얼굴도 모르는 하느님을 원망했었다. 교실로 들어가 몇 번 펴보지 않아 새 것 그대로인 체육교과서를 펼쳐들고 읽는 척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체육관도 학교의 시설임을 알고는 그 학교가 명문인 듯 오해를 했었고, 처음 그곳에 들어갔던 날에는 어찌나 반가웠던지 맨발로 뛰다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서야 뛰기를 중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의식주 만큼이나 익숙한 용어 지덕체. 그래서 체육은 운동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비가 오면 그저 하늘만 탓하며 처진 어깨를 하고 교실로 들어갔었다. 하늘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눈을 흘겼는가? 본능처럼 뜀박질을 해대던 부시맨도 아니면서 거참!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런데 체육 혹은 운동이란 규칙이 있는 것이고 그것의 훈련과 습득을 통해 사회의 규칙을 배우기 때문에 삶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우리는 비가 오면 규칙의 훈련과 습득을 중단했었고 그럼으로써 삶의 한 순간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얼마 전부터 체육관 혹은 다목적 교육관이라는 이름의 실내체육시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의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도 올봄부터 그것을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어 콘크리트 스탠드가 철거되었다. 그런데 비가 와도 배움의 시간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임을 넘어 당연한 것인데 그 모습을 보면 이건 더욱 씁쓸하다. 스탠드가 뜯겨 나가면서 뒤에 버티고 있던 은행나무 몇 그루가 덩달아 없어졌다. 한 때는 담장을 허물고 숲을 만든다고 떠들썩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휀스가 생기고 심겨져 있던 나무들은 하나 둘 사라지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 몇 개월째 레미콘과 펌프카가 콘크리트를 쏟아 붓고 있다.

‘학교숲’... 가슴이 떨리는 용어는 아니지만 ‘참교육’이라는 말보다 훨씬 교육적일 것 같고 실효성은 상대가 안되리 만큼 클 것 같아 거리를 탓하지 않으며 지역의 이곳저곳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닌 적이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름 그럴듯한 학교도 생기고 반면 왜 했을까하는 실패작도 있었다. 그렇지만 실패라기보다는 시행착오로 생각하면 다음 학교에서는 만회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잠시이기는 했지만 학교숲 조성이 사회적 운동처럼 일어났던 시절이었다. 서울시에 천만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정책을 필두로 각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가 하나가 되어 학교에 심었던 나무 몇 그루는 또 다른 교실 역할을 할 수 있어 흐뭇했었는데 지금은 용어조차 생소할 정도로 급속히 사라졌다. 사라진 것인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것인가? 숨고르기라면 다행이련만 더하기와 빼기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상상속의 가르침이라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숲 만들기가 중단된 것이 교육현장의 중요한 학습이론인 ‘시행착오’의 하나는 아닐 것이다. 정책의 변화이거나 관심 밖의 문제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를 포함하여 지금 이 순간의 교육현장에는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뛰어 다녔던 세대가 대부분일 것이다.

운동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강점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연병장이다. 그것이 모습을 바꾸면서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담게 된 것이다. 학교의 한 귀퉁이를 이용하여 나무를 심어 주었던 학교숲 조성 지원활동에서 발생한 가장 큰 저항은 조기축구회와 체육담당교사에 의한 것이었다. 연병장으로 사용했던 군사문화가 없어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사용자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과 대화를 하고 소통을 하면서 적절한 방안을 찾으면 학생들에게 자연의 한 조각을 선물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화를 할 상대도 없고 대화할 기회도 없어졌다. 수 십억 혹은 그 이상의 예산을 콘크리트 심기에 사용하면서 몇 푼되지 않는 숲 조성은커녕 있던 나무들마저 뽑아버리고 있다니... 교육행정을 하는 이들도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들도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건강하게 자라 사회에 좋은 구성원이 되길 바랄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을 넘어 답답하기만 하다.

한 때 즐겁게 지원을 다녔던 것은 학교숲이 우리의 먹거리를 해결해주었던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다양성과 균형감을 가르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콘크리트도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일 것이고 그것으로 만든 건축물 역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숲속에 있는 교실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자연과 생명을 배울 수 있는 교실이 그 콘크리트 옆에 하나 더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강한 육체를 위하여 균형있는 식단이 필요한 만큼 건전한 정신을 위해서는 절대균형이라는 교육철학이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다면 누가 승리를 하던지 국민들에게 큰 문제가 되겠는가? 좋은 견제장치로서의 기능만 작동한다면 오히려 건강한 국가가 될 것이고 콘크리트와 숲이 적절한 균형을 갖춘 교실에서는 건강하고 건전한 아이들이 자라날 것이다. 100년의 큰 계획 속에서 학교숲을 빼놓은 것이 순간적인 시행착오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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