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조경신문 지재호 기자] 기자는 얼마 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며 중력을 거스르는 피 쏠림을 체험했다.

어렵게 만나 인터뷰를 하고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는 소중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뭇 나 또한 얼마나 많은 편견과 아집에 둘러싸여 그 속에서 내면을 감추기 위해 눈물겨운 싸움을 해 왔는가에 대해 잠시 숙연해졌다.

내가 만났던 그는 남에게 관심과 소통, 관찰과 이해, 자신의 열린 마음을 주장하고 강변했다.

그러나 문자 한 통으로 모든 것이 철저하게 기획되고 만들어진 느낌이라는 것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어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기사 나가기 전에 한번 공유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작성하면서 문자를 받았을 때 잠시 생각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일까. 일단 기사 공유에 대해서는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는 “안타깝군요. 인터뷰 기사 나가는 것 거부합니다.”라고 보내왔다.

언론사 기자는 공인이다. 공인이기 때문에 요즘에는 밥 한 끼 먹자는 말에도 민감하고 조심스럽게 들린다.

기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실을 근거해서 풀어나간다. 만난 사람의 성향이나 이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암흑 속에서 더듬거리며 고양이 꼬리인지 호랑이 꼬리인지 느낌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세상이라서...” 마치 화장을 하지 않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가면 쓰고 다가오면 기자도 사람이라 속을 수 있다. 때문에 어떤 말을 하고 그 말 속의 진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글의 방향도 달라진다.

한 때 기사검열로 언론사를 통제하고 왜곡된 글로 민중을 혼란스럽게 만든 시대가 있었다. 권력에 의해 휘둘린 글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민족 분열을 야기했고 서로 다른 이념 대립을 초래하기도 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기사에 대한 사전 검열, 검열이 아니라 공유(Share)로 표현되고 있지만 기사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 원고를 보겠다는 것은 공유라는 차원이 아니라 사전 검열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기사를 마음대로 조정해 민중을 호도(糊塗)하려 해서는 안 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는 것처럼 언론이 바로서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했다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사전 검열은 이와는 반대였기에 사전에 부끄러운 민낯을 차단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어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기사 나가기 전에 한번 공유 부탁드립니다.”

친절한 문장 속에 가려진 진실은 자신의 거짓된 마음을 들키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것 일뿐 좋은 관계의 시간은 관심 밖의 일처럼 보인다.

혹자는 ‘기사 한번 공유하자는데 너무 나간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이 쓴 글을 난도질하고 호도하고 왜곡된 문장으로 나열한다면 어떤 심경이겠는가. 차라리 펜을 놓는 게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전문지는 업계를 흔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Only Yes’, ‘Only No’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18세기 계몽 사상가이자 작가인 프랑스 볼테르(Voltaire)의 말 속에 우리 의도가 있음을 그들이 알아주길 희망해 본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도록 싸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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