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조경수협회(회장 이강대)가 1967년12월 5일 산림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으면서 조경분야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단체가 됐다. 한국조경신문에서는 오는 12월 5일 11시부터 계룡스파텔 태극홀에서 열릴 예정인 ‘사단법인 한국조경수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식’ 행사를 앞두고 ‘특집연재 - 한국조경수협회 50주년 기록’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본 원고는 협회 발간 예정인 50년사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밝힌다. <정리 : 정대헌 기자>

한국조경수협회 50주년 기록
<1> 창립 전 역사(1880년대말~1966년)
<2> 발족부터 현재까지(1967~2017)<3> 회원현황 및 주요 활동
<3> 회원현황 및 주요 활동

한국조경수헙회가 법인체로 발족한 지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조경수를 생산하여 조경사업에 공급한 것은 이 법인체로 발족하기 이전에도 상당기간 실시한 사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실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지난 40년사를 발간하면서 1967년 법인체 발족 이전을 조경수협회 전사(造景樹協會前史)로 하여 발간한 바 있다. 이 전사는 조선조 말기인 1880년대 말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처 8.15 해방 후 1967년까지 관상수(이하 조경수라 한다)를 재배 공급한 사실을 각종 문헌을 참고하고 실제 참여한 재배자들의 증언을 청취하여 작성한 것이다.

구한말-한일 합병 기간 중 조경 현황

1889년 인천 만국공원 (현 자유공원)
1896년 서울독립공원, 1897년 파고다공원, 화성공원(숭의대 부근)
1907년 대구 달성공원
1909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 동물원과 식물원조성
1910년 회현지구 일원 한양공원
1919년 철도공원, 장춘단공원,
1924년 효창공원과 사직공원
1930년 삼청공원, 남대문공원, 앵정공원(현 중구 어린이공원)


초창기 조경수 재배업체들
우리나라 조경수 재배의 역사를 보면 1923년 서울에서 유흥업 씨가 효자원 을, 박원순 씨가 보록원 상호로 처음 조경수를 재배하였으며, 청주에서 한태현 씨가 1930년에 임업시험장에서 향나무 씨 두말을 가지고 와서 산림묘목을 생산하면서 조경수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진주지방에서는 김영실 씨가 1950년대 금강식물원 상호로 조경수를 생산하였으며, 1957년부터 박능관 씨와 박능대 씨 형재가 금잔디농원의 상호로 포도 및 잔디를 재배하였으며 그 후 목련, 옥향 등을 재배하여 일본에 수출하였고 일본에서 가이즈가 향나무를 수입 재배하여 판매하기도 하였고 60년대에는 정부에서 지정받아 산림묘목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1967년까지 기간의 재배 업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김명원 씨 만수원, 성춘근 씨 명동화원, 이우면 씨 서울화농원, 정진오 씨 종로화원, 윤상해 씨 흥농종묘, 김영식 씨 효창식물원, 김동식 씨 상록원, 김행민 씨 명종화원, 부산 이문택 씨 임화원, 광주 정하도 씨 광주식물원, 인천 박기환 씨 송도식물원, 수원 송영복 씨 송록원 등이 있었다

이상 조경수 생산업체는 각종 문헌과 관련자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나 누락된 업체도 있을 수 있고 창업 연대 착오도 있을 수 있어 이후 계속해서 보완 수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조경수 재배의 발단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조경수를 인공 재배하여 식재한 기록이 거의 없고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면서 산림묘목을 업자에게 배당하여 생산케 하였으며 또 양잠을 장려하면서 뽕나무를 많이 재배하여 보급하였고 일부 관상용으로 화훼 재배를 한 바 있는데 이들 생산업체들이 조경수의 수요가 발생하면서 조경수를 겸하여 재배하게 되었다.

① 산림묘목생산과 조경수 재배 : 조림과 사방사업에 소요되는 묘목을 당국이 지정하여 재배하던 중 조경수의 수요가 생기면서 조경수도 겸하여 재배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업체로는 효자원, 보록원, 진주의 금잔디식물원 등을 들 수 있다.

② 뽕나무 재배와 조경수 재배 : 일제는 양잠업을 장려하였는데 이에 필요한 뽕나무를 많이 재배하게 되었고 이 뽕나무는 접목 묘로 재배하였다. 뽕나무 재배와 더불어 조경수를 재배하는 업체가 생기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조치원의 한관동 씨이며 청주의 한태현 씨 라고 볼 수 있다. 뽕나무 접목묘는 주로 충복 옥천지방에서 생산한 바 있어 현재도 이 지방에서 벚나무 접목묘 등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③ 화훼사업자가 조경수재배 : 꽃을 재배하던 업체도 조경수 수요가 발생하면서 조경수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업체는 서울의 명동화원, 종로화원, 화농원, 효창식물원, 상록원, 명종화원, 부산의 임화원, 광주의 광주식물원 등이다.

그 시절 재배된 주요 수종
① 일제시대 : 조경수종은 조경 양식에 따라 달리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조경은 전통적으로 자연적인 풍경을 묘사하는 양식을 취하였고 유럽에서 행하는 기하학적인 양식의 조경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제가 강점하고 경복궁에 중앙청을 건립하면서 1920년대 말에 중앙청 서쪽에 정원을 만들고 덕수궁에 선큰가든을 만들면서 기하학식 정원양식이 도입되었다.

이와 같은 기하학식 정원양식에는 식재되는 조경수도 기하학식으로 조형된 조경수를 식재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수종이 가이즈까향나무, 섬잣나무, 옥향, 회양목, 측백나무 등 정형화된 수목을 심게 되었고 일본에서 수입한 홍단풍과 일본국화로 개량한 왕벚나무 등을 식재하였다.

이 왕벚나무는 일제가 1910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하여 유원지로 전락시키고 이곳에 일본의 국화인 왕벚나무를 다량 식재한 바 있다. 이 왕벚나무는 1983년 창경궁으로 복원 정비하면서 모두 굴취하여 외부로 반출하였다.

이 외에 철도역 주변에는 울타리로 측백나무를 거의 전국적으로 식재하였고 역사 정면에는 정형화된 주목을 대칭으로 식재한 곳도 있다.

일본인이 거주하는 주택에는 가이즈까향나무, 섬잣나무, 옥향 등으로 정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던 이만 씨가 나무 할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조예가 있어 조경수로 가치가 있는 수종으로 낙상홍, 계수나무, 쥐똥나무, 홍단풍, 두충나무, 좀작살나무, 향나무, 모감주나무 등을 한림의 한태현 씨에게 제공해주어 우리나라 조경수종 개발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② 8.15 해방 후 : 8.15 해방 후에는 지역별로 조경수 생산 권역이 형성되었는데 그 개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도권=서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1923년 효자원이 계속 조경수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보록원, 명동화원, 서울화원, 명종화원, 종오화원 등으로 주로 화훼산업을 하든 업체가 조경수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주요 생산 수종은 가이즈까향나무, 섬잣나무, 회양목, 반송, 양버즘나무, 철쭉, 영산홍 등이었다.

▲진주지역=우리나라 조경수 재배의 메카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재배 역사도 매우 오래된 곳이도 하다. 이 지역은 8,15 전에 일본인이 경영하든 농장을 해방되면서 금강식물원이 인수하여 조경수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금잔디농원 등 100여개 업체가 조경수를 재배 하였다. 주로 재배한 수종은 백목련, 팔손이, 천리향, 금목서, 회양목, 홍황철쭉, 옥향, 금송, 은행, 양버즘나무, 왕벚나무, 히말라야시다, 가이즈까향나무 등이었다.

▲충청지역=충청지역에서는 주로 산림묘목을 생산하든 업체가 조경수를 재배하였다. 청주의 한태현 씨는 1930년부터 향나무 씨를 임업시험장에서 2말 확보하여 향나무를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1957년에 일본에서 가이즈까향나무와 백목련을 각각 500본씩 수입하여 재배하였다. 조치원의 흥농원도 일본인이 경영하든 농장을 인수하여 조경수 재배를 하였는데 일본에서 가이즈까향나무를 수입하여 재배하였고 섬잣나무를 대량 생산하였다. 충청지역에서 생산된 수종은 씨향, 백목련, 섬잣나무, 가이즈까향나무, 버즘나무, 쥐똥나무, 계수나무, 낙상홍, 좀작살나무, 낙우송, 두충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옥향, 회양목 등이었다. 생산된 조경수는 대부분 서울로 반출되었으나 흥농원의 경우 울산의 한국비료공장, 대구의 제일모직 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량의 가이즈까향나무와 섬잣나무를 열차편으로 배송하였다고 한다.

▲부산지역=부산지역에서 1970년대 이전에 조경수 재배 업체는 임화원과 상록원이 있었다. 주로 생산된 수종은 가이즈까향나무, 진백, 영산홍 등이다.

▲제주지역=1960년데 제주지역에서 최초로 조경수를 생산한 업체는 강창학 씨이며, 주로 재배한 수종은 가이즈까향나무, 은목서, 섬잣나무, 벚나무, 야자수 등이었다. 당시 조록나무와 동백나무는 한라산에서 자연생을 굴취하여 사용하였다.

▲ 2007년 11월에 열린 ‘한국조경수협회 창립 40주년 기념식’ 모습 <사진제공 한국조경수협회>

협회를 설립하게 된 경위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경제성장에 탄력을 받은 정부는 국민들의 개발 지지에 고무되어 도시 및 국토개발에 속도를 더했다.

이같이 급격한 도시화 및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도로, 주택, 통신, 상하수도 등 전반적인 사회간접 부문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토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우리들이 지키고 보전해야 할 귀중한 문화재들이 훼손되고 산림의 파괴. 강·하천의 오염 등 환경적 폐해의 유형이 다양하게 드러났으나, 당시 정치·경제·사회 실정으로는 이러한 환경훼손을 방지하는데 까지 신경을 쓸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건설업에 수반되던 조경산업은 공사의 규모면이나 수익성면에서 기대 이하였으므로, 수목을 생산하는 조경업계가 영세성을 면키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경제의 고도 성장에 따라 건설경기는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수반되는 조경수목의 수요도 해마다 점점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은 전국의 군소 조경수 생산업자들은 각종 정보의 상호교환, 새로운 생산기술 습득 등 조경수 생산업자의 단합된 조직의 필요성을 지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조경수 업계의 정상적인 발전궤도 진입을 눈앞에 두고도, 영세한 조경수 업자들은 낮은 수익성과 업체 간의 과다경쟁으로 정상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악순환을 단절하고 업계 공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업계가 단합하여 실질적인 권익보호를 위한 조직을 구성, 단합된 힘으로 대처해 나가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경공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관상수(화훼 포함) 생산에 대한 정보교류를 통해 관상수의 물동량을 조절하여 적정한 가격으로 유통될 수 있도록 하며, 더 나아가 산업화 진전에 비례하여 훼손되고 있는 국토의 녹화는 물론 전국토의 관광자원 개발시책에 호응·협력하고, 관상식물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개발과 유통의 합리화를 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소리가 높았다.

1962년 효창식물원에서 발기인대회 가져
이러한 취지 아래, 경제개발 시발연도인 1962년 3월 2일 서울시 효창동 산 1번지에 소재한 효창식물원에서 당시 서울의 효자원 대표 유창식 씨, 효창식물원 대표 김영식 씨, 수원의 송록원 대표 송영복 씨, 청주의 한림농원 대표 한태현 씨 등이 주축이 되어 전국 관상수(화훼 포함) 생산 및 양묘생산자, 원예 관계자 증 16명이 모여 발기인 대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당시 발기인대회에 참석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

▲서울 : 보록원(박원순), 효자원(유상식), 종로화원(정진오), 명동화원(성춘근), 효창식물원(김영식), 상록원(김동식), 서울화농원(이우면), 명종화원(김행민), 흥농종묘(주)(윤상해) ▲수원 : 송록원(송영복) ▲청주 : 한림농원(한태현) ▲조치원 : 한농원(한관동) ▲진주 : 금강원(김영관) ▲부산 : 임화원(임원택) ▲광주 : 광주식물원(정하도) ▲인천 : 송도식물원(박기환)

1962년 ‘관상수 생산업자간의 권익을 옹호하고 도시경관 미화와 환경보호’를 창립이념으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한 이래 생산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직을 체계화하는데 노력해 왔다.

그러나 원예와 관련된 화훼업계 측에서 협회 명칭을 ‘대한관상수생산협회’ 보다는 ‘한국원예협회’로 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내고, 강태봉 씨를 중심으로 한 몇몇 화훼 관련업자들이 농림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로비 활동을 하는 등 협회의 진로에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협회 회원 중에서는 범업계적 대동단결을 위해 원예 관련업체들도 참여토록 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조경과 원예 부문 간의 과다 경쟁으로 공방이 극심해지고, 업체 간의 담합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중첩되자 발족 당시의 설립이념에 부합할 수 있는 회원들만으로 뜻을 보아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협회 발기인 대회부터 총회를 개최하기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숱한 진통을 겪어온 협회 관계자들은 총회 개최시기의 완급과 일정의 불투명함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였고, 협회의 존립 여부를 둘러싸고 회의적인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조직을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간과키로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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