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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사찰정원
[0호] 2017년 07월 10일 (월) 13:40:17 홍광표 한국정원디자인학회 회장 koreagarden@daum.net

[월간가드닝=2017년 7월호]이번 특집에서는 우리 문화와 역사가 녹아있는 사찰이라는 종교적 공간에서 사찰정원이 흘러온 과정과 그 결과 발생한 독특한 양식의 정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한국전통조경과 전통정원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홍광표 동국대 조경학과 교수가 전국 곳곳의 한국사찰정원을 안내한다. <편집자주>

한국의 사찰정원은 불교전래 초기단계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 교단이 형성된 인도는 물론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준 중국의 경우에도 사찰정원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사찰정원은 불·법·승 삼보를 모신 사찰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공간에 형성되는 정원들과는 내재적 의미가 다르고, 나타나는 경관성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발굴조사결과나 복원된 정원의 형식을 놓고 볼 때, 불교전래 초기에 우리나라에 조성된 사찰정원은 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계 사찰과 신라계 사찰의 경우 못의 형식에서 엄연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말여초가 되면서 선불교가 전해지고 사찰이 산간벽지로 옮겨간 후 대부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경승지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지 않아도 자연 그 자체가 정원이라는 의식이 선사(禪師)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어 사찰정원의 개념이 사찰주변의 자연으로까지 확장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의 사찰정원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사찰정원으로 현재까지 그 모습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춘천 청평사의 영지 정도이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불교사찰이 대부분 산지로 옮겨갔고, 불교가 핍박을 받는 환경에서 사치스럽게 정원을 조성할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찰정원의 전통이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산지사찰에 조성된 다양한 유형의 사찰정원이 의외로 많아 사찰정원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정원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사찰에 조성된 정원을 못이 중심이 되는 사찰정원, 자연계류를 활용한 사찰정원, 나무와 꽃을 중심으로 조성된 사찰정원, 자연경물을 소재로 활용한 사찰정원으로 유형화하고, 각각의 유형에서 대표적인 사찰정원들을 경관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Part 1 못이 중심이 되는 사찰정원

   
▲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고려시대 ‘관경십육관변상도’자료출처 :‘고려불화대전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10, p.46

사찰에 조성한 못에는 연을 심어 꽃을 피우기 위해 만든 연지와 못물에 그림자가 비쳐지도록 만든 영지가 있다.

연지는 불교경전인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정토삼부경’은 정토사상의 소의경전으로,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으로 구성된 이 경전에는 극락정토의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장엄이 설해지는데, 특히 ‘관무량수경’에는 정토를 관(觀)하는 16가지 방법이 있어 이 16관법을 통해 극락정토의 수승한 경관을 그려볼 수 있다. ‘관무량수경’ 16관 가운데에서 제5관이 바로 ‘보지관(寶池觀)’으로 ‘보지관’은 칠보로 된 연못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토에는 칠보로 된 연못이 있는데, 그 속에는 여덟 가지 공덕이 있는 물이 가득 차 있다. 이 물은 여의보주(如意寶珠)에서 흘러나와 나눠져 열네 갈레로 흘러간다. 하나하나의 갈레에도 역시 칠보의 빛을 띠고, 또 다시 이 연못에서 황금으로 된 작은 개천을 이룬다. 이 작은 개천 밑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금강의 모레가 깔려있다. 이들 개천에는 60억 가지나 되는 칠보로 된 연꽃이 피었고, 그 낱낱의 연꽃은 둥글고 탐스러워 한결같이 12유순(由旬)이나 된다. 이 보배구슬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은 보배연꽃과 보배나무 사이로 흐르고, 묘한 소리를 내고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법과 모든 바라밀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또 마니보주는 금색광명을 놓고, 이 광명은 백가지 보배색으로 된 새가 되어 항상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는 공덕을 찬탄한다. 이것이 팔공덕수를 생각하는 것이고 제 5관이라 이른다.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바로 ‘관경변상도’인데, ‘관경변상도’ 즉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는 관경서품변상(觀經序品變相)과 관경십육관변상(觀經十六觀變相)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 그려진 ‘관무량수경변상도’는 매우 희귀하여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그 중 다이온지(大恩寺) 소장의 ‘관경서품변상도’,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관경변상도’,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관경서품변상도’와 ‘관경변상도’ 등 4폭이 전해지고 있다.

   
▲ 봉원사 마당에 피어난 연꽃

‘관경변상도’에 그려진 보배 못은 연꽃이 가득 피어있는 연지이다. 이러한 연지의 모습은 일본 지온인(知恩院)에 소장된 고려시대(1323년 제작) ‘관경십육관변상도’에도 확연히 나타난다. 그림을 보면, 상부 누각 위에 하나, 상부 삼존상 좌우에 하나씩 두 개, 중앙 삼존상 좌우에 하나씩 두 개 그리고 하부 아미타불과 협시보살 하단에 3개의 연지가 그려져 있다. 하단에 그려진 연지는 중앙의 것이 상배관 연지이고, 향우측의 것이 중배관 연지, 향좌측의 것이 하배관 연지로 각각 그림의 내용이 다르다. 즉, 중앙의 상배관 연지는 아미타삼존이 상배왕생자를 맞이하고 있고, 향우측의 중배관 연지는 두 보살이, 향좌측의 하배관 연지는 한 보살이 각각 중배 왕생자와 하배 왕생자를 맞이하고 있어 왕생의 등급에 따라 내용이 틀림을 보여준다.

연을 심어 꽃을 피우기 위해 만든 연지

이처럼 불교에서는 연지가 정토를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존재였으므로, 연지가 불교사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상징물로 작용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한국의 사찰에서 만들어지는 못을 중심으로 하는 정원은 ‘정토삼부경’의 내용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러한 한국사찰의 연지는 중국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생지(放生池)’와 유사하다. ‘방생지’는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주로 사찰의 산문 앞에 조성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물고기를 놓아주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당나라 숙종 건원 2년(759)에 황제는 각 사찰에 방생지를 만들도록 하교하여 당시 중국사찰에 만든 방생지가 81개가 있었다고 한다. 방생지는 방생의 목적 이외에도 연을 심거나 미기후를 조절하는 기능도 하였으며, 방화수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사찰에 조성된 지당은 중국의 방생지가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주로 연화를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 중국사찰의 방생지

못물에 그림자가 비쳐지도록 만든 영지

영지는 비치는 대상에 따라 탑영지(塔影池), 불영지(佛影池), 산영지(山影池)로 구분된다. 탑영지는 탑을 비치도록 만든 것이고, 불영지는 불상이나 불상을 상징할 수 있는 대상을 비치도록 하는 못이며, 산영지는 산봉우리가 비치도록 자리를 잡아 조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묘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탑을 배치하였다. 탑의 형태는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유체를 다비하고 수습한 사리를 8분하여 모신 반구형의 스투파를 비롯하여 중국식의 파고다, 한국식 석탑, 일본식 목탑 등 다양하다. 이러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묘탑을 비치도록 한 것이 바로 탑영지인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신앙의 대상이었던 불교사찰에 새로운 신앙의 대상인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대체로 2~3세기경이라고 한다. 불상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간다라지방과 마투라지방인데, 불상은 부처를 인간적인 화신으로 숭배하려는 필요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사리탑이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었던 사찰에서 불상이라는 새로운 신앙의 대상이 생기게 되었으며, 불상을 봉안한 전각들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서 사찰에서는 사리탑과 불상이 양립하는 현상을 보이게 되며, 중국사찰과 한국의 사찰에서는 불상을 축선의 가장 끝부분에 위치한 전각에 두고, 사리탑은 전각으로 둘러싸인 중정의 중심에 두게 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이러한 불상이나 불상을 닮은 바위 등을 비치도록 만든 못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불영지이다.

불교가 도입되기 전에 한국인들은 고대민간신앙의 예배대상 중에서도 특히 산에 대해서 매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산에는 그곳을 주재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한 산악숭배는 한국에 불교가 전해지고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불교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즉, 전래민간신앙과의 마찰을 피하고 불교를 전 사회적으로 파급시키기 위하여 산신신앙을 불교화함으로써 ‘신 즉 불’이라는 사고체계를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산신신앙을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산영지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탑, 불, 산은 그 자체가 성보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는데, 심지어 그것의 그림자까지도 성보의 개념으로 확장하여 공경한 것은 일반인들에게 신이적인 내용을 전달하여 종교적 감동을 주고자 하는 초기불교의 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지가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찰에 조영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몇몇 사찰에 전해지는 사적기나 설화에는 영지에 대한 내용이 있어 실제 영지의 기능을 가진 못이 사찰에 조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선암사 삼인당

주요 사례지

■ 선암사 정원

   
▲ 변형되기 전의 선암사 곡지

선암사에는 못이 많다. 절을 품고 있는 조계산에 물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선암사에 있는 못은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삼인당(三印塘), 일주문 서쪽의 곡지(曲池), 설선당 서쪽의 쌍지, 산신각 하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작은 방지 등 4곳이나 된다. 그러니까 선암사 정원은 물이 중심이 되는 정원인 셈이다. 그밖에도 키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 그리고 꽃이 피는 초화류도 많아 선암사는 다른 사찰에 비해 정원적 개념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사찰이다.

   
▲ 삼성각 전면의 작은 못
   
▲ 오물을 걸러내기 위해서 만든 정류지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결과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조경적 전통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도 우리 역사의 한부분이라면 선암사와 같이 정원적 요소가 많은 절도 한국불교의 귀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선암사에서 주목할 만한 정원적 요소를 하나씩 살펴본다.

삼인당

   
▲ 물을 도수하기 위해 설치한 일본양식의 곡수로

삼인당은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타원형 못으로 못 안에는 난형(卵形)인 중도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난형의 중도는 자각자리(自覺自利)를 의미하고, 긴 타원형 못은 각타이타(覺他利他)를 의미하며, 중도나 지당의 형태가 직선이 아닌 곡선인 것은 모남이 없이 둥글게 각행(覺行)을 성취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삼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등 ‘삼법인(三法印)’을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선암사 중창건도기’에 나타난 삼인당 자리에는 장방형의 지당이 그려져 있어 이 못이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그 형태가 장방형에서 지금의 타원형으로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법인을 통한 의미부여는 개조된 후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 곡지에 물을 대던 곡수로가 있던 자리에 만든 주차장

삼인당의 규모는 동서 장축이 약 24m이고 동쪽의 넓은 폭이 약 15m 되며, 자연석으로 쌓은 호안의 높이는 약 1.4m이고 수심은 약 0.6m이다. 못의 동쪽에 치우쳐 축조된 난형의 섬(장축 9m, 단축 8m)에는 전나무 1주와 배롱나무 1주가 심어져 있다.

삼인당의 물은 선암사 경역 옆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계류로부터 작은 정류지를 만들어 나뭇잎 등 오물을 걸러낸 후 길이 약 20m, 너비 약 70㎝, 깊이 약 30㎝의 개거(開渠)를 통해 물을 못으로 도수하였다. 그러나 보수공사를 하면서 암거暗渠)로 개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발굴조사에서 원래 입수로가 현재의 위치에서 남쪽으로 8.5m 떨어진 지점에 있었으며, 지표로부터 60㎝ 깊이에 만든 너비 30㎝, 깊이 23㎝ 크기의 암거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일주문 서쪽의 곡지

   
▲ 성보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변형시킨 곡지
   
▲ 선암사 폭포

현재는 그 자취가 변형되어 버렸지만 20여년 전만해도 선암사 일주문 서쪽에는 상하 2개의 곡지(曲池)가 있었다. 곡지의 호안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곡선호안으로 축조되었으며, 못 안에는 돌을 하나 세웠고, 못 주변에 좌석석이 하나 있었다. 곡지의 물은 설선당 서쪽에 만든 쌍지(雙池)에서 흘러내린 물이 곡선형 수로(야리미즈, 견수遣水)를 통해서 윗못으로 들어오고 이 물이 다시 폭포를 이루며 아랫못으로 떨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 사찰의 못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곡지의 물깊이가 얕아 지면과 비슷한 레벨을 유지하도록 만든 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못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이곳에 가면 못 주변에 놓은 좌선석에 스님이 앉아 선정에 들어있는 모습을 가끔 볼 수가 있었다.

   
▲ 설선당 서쪽의 쌍지

선암사의 곡지는 일본의 지천회유식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에 이러한 곡지가 만들어진 것은 선암사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신도들이 많았고, 이 절에 주석했던 스님들이 일본 유학을 하고 들어와 소임을 맡아 절을 경영한 결과였다. 그러나 일본정원에서 전통적으로 조성되어온 곡지형식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에서 집중적으로 모습을 보였으나,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에서는 사라졌던 형식으로 이제 그러한 형식의 한국적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에 조성되었던 곡지는 성보박물관을 건립하면서 형편없는 수준의 작정을 통해서 변형되었고, 곡지로 물을 도수하던 곡선 수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더불어 못에서 흘러넘친 물이 다시 수로를 따라 흘러내려서 높게 쌓은 석단에서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모습까지도 사라지고 말았다.

설선당 서쪽의 쌍지

선암사 쌍지는 정사각형 모양으로 생긴 두 개의 방지를 말하는 것인데, 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쌍지의 호안형식을 보면 북측의 지형이 남측보다 높기 때문에 동서 두 개의 못 모두 북측호안의 석축높이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런데다가 진입이 남측으로부터 북측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북측호안석축이 강하게 인식된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쌍지의 북측호안석축은 자연석을 가로변이 세로변보다 1.5~2배 정도 길게 다듬어 이를 맞추어 쌓아 올렸으며, 옆줄을 맞추지 않은 허튼층쌓기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북측을 제외한 나머지 호안은 각각 석축기법이 달라 정연하지 않은데, 대체적으로 자연석을 형식 없이 쌓아올렸으며, 부분적으로 시멘트모르타르가 노출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선암사 쌍지의 북측호안석축은 근년에 보수한 것으로, 새로 쌓기 전에는 일본식 견치석 쌓기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보면 쌍지는 모두 일제강점기에 축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보수과정에서 한국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일본양식의 돌쌓기 흔적이 남아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선암사중창건도기’에 이 쌍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두 개의 못이 일제강점기에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선암사 쌍지의 형태는 동․서지 모두 동서변의 길이가 5.3m, 남북변의 길이는 약 4.5m 정도 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호안석축의 높이는 동․서지 모두 약 1.3m 정도이며, 드러난 석축의 높이는 0.9m 정도로 현재의 수심은 40cm이다.

■통도사 정원

   
▲ 통도사 구룡지와 금강계단·대방광전

속전(俗傳)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대사가 큰 못을 메우고 그 곳에 금강계단을 축조할 때 못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곡동으로 쫓겨 갔으나 오직 한 마리는 굳이 남아 터를 수호하겠다고 굳게 맹세하므로 자장대사가 그 청을 들어주어 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서 그 용이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구룡지(九龍池)로 금강계단, 대방광전, 삼성각, 산령각 등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규모의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구룡지의 형태는 타원형이며, 못 중간에는 돌다리가 가설되어 있고, 물에는 수련을 심어 놓아 연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의 상황으로 볼 때 본래 이 못을 조성한 의도는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금강계단을 수면에 비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계단은 자장대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의 성소聖所로 통도사의 정신적 중심이기 때문이다.

   
▲ 통도사 구룡지와 삼성각·산령각

구룡지는 수면하부의 호안에 자연석을 가로가 약간 길게 네모난 형태로 깎아 첩석하였고 그것의 상부에는 긴 돌을 위로 볼록하게 다듬어 갑석형식으로 올려놓은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찰뿐만 아니라 다른 조경공간에서도 이러한 형식으로 조성한 못의 호안을 찾아볼 수가 없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통도사 금강계단일원에 대한 수리공사가 있었다는 사중 스님들의 이야기가 있어, 구룡지 역시 이때 손을 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못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고, 다리의 형태가 일본양식이며, 호안의 돌을 볼록하게 깎아 치장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구룡지의 규모는 장변이 8.8m, 단변이 5.6m이고, 호안의 전체 석축높이는 1.6m, 못 깊이는 1.1m이며, 드러난 석축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갑석처럼 조성한 둘레돌은 90cm 정도의 길이에 높이는 25cm 정도이다.

   
▲ 통도사 영산전 앞 원형지

구룡지를 중심으로 하는 통도사 정원은 구룡지의 독특한 양식과 더불어 많지 않은 영산홍을 바탕으로 못 옆에 단출하게 서있는 배롱나무의 조화로움이 인상적이다. 못에 배롱나무를 쓰는 것은 일본정원인 지천회유식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에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영산전 앞에도 원형의 못이 하나 있는데, 구룡지보다는 크기가 작다. 이 원형지 역시 주변의 그림자를 비치도록 의도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못의 호안처리가 구룡지와 같아 구룡지가 변형될 때 함께 손을 댄 것으로 보인다. 봄에는 원형지 뒷면 석단 위에 자목련, 홍매, 영산홍 등이 피어나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불영사 영지

   
▲ 봉원사 원도방지

울진 불영사(佛影寺)는 진덕왕 5년(651)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 절의 창건연기는 고려 공민왕 19년(1370) 유백유(柳伯儒)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天竺山佛影寺記)’에 실려 전해진다. ‘천축산불영사기’는 불영사에 대한 최초의 기문으로 1611년까지만 해도 원문이 절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고 없다. 다행스럽게도 기문의 내용이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하권 강원도부에 전해져 내려온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봉원사 연지 사진(1942년경)

의상법사가 신라의 수도 경주(東京)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 해운봉(海雲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마치 서역의 천축산과 같은 형세의 땅이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 위에 부처님 다섯분의 형상이 비쳐 인연 깊은 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부근 금탑봉 아래 폭포에 독룡이 살고 있어 법사가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냈다. 용은 분하여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는데 법사가 못을 메워 사찰을 창건하였으니 남쪽에 청련전(靑蓮殿)을 짓고 무영탑(無影塔) 1좌를 세워 비보한 뒤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후략)

   
▲ 불영사의 영지와 부처바위

기문의 내용을 보면, 의상법사가 부처님 다섯 분의 형상이 물 위에 비쳐지는 것을 보고 절을 세웠다는 것인데,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친 못은 지금까지 불영지로 불리고 있다. 이것을 보면, 이미 신라 때부터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치는 못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불영을 신성한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불영사의 불영지는 불영지인 것이다.

■봉원사 정원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다. 이후 고려시대 말 공민왕대에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중창하였고,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전각이 소실되어 효종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는 등 여러 번의 중창과 중건이 있었다.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事)라 현액하였다.

사찰의 주변을 둘러싼 안산(鞍山)은 말의 안장을 얹어 놓은 것과 같은 봉우리 모습 때문에 안산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 산의 약간 동남방향으로 흐르는 봉원천의 상류부근, 비교적 지세가 완만한 중턱에 현재의 봉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원사 정원은 대웅전 정면 진입로 변에 있는 연지를 중심으로 한다. 연지는 장방형 못으로 가운데 둥근 섬을 두고 있다. 섬에는 수령이 약 300년이 넘어 보이는 향나무가 하나 있어 못의 조성연대도 이에 상응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 사찰이 이건되면서 함께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사찰이 위치한 산의 모양이 개 허리 모양이라 스님들끼리 분쟁이 잦아 밥그릇을 만든다는 개념으로 연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원도 방지형식의 지당과 섬 안의 향나무 호안의 거석 등이 있어 연지가 그 당시에도 지금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스님이 어렸을 때만 해도(약 70년 전) 못에는 연이 가득 피어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바닥에서 뻘층을 확인할 수 있어 연지로서의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흥사 정원

   
▲ 대흥사 무염지

대흥사는 두륜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원래는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대흥사는 넓은 분지에 자리 잡은 까닭에 자유로운 배치공간을 구성하며 동서방향으로 흐르는 금당천이 있어 이를 기준으로 크게 북원과 남원으로 구분된다.

대흥사 정원은 무염지라는 못을 중심으로 하는데, 무염지는 가허루 앞쪽에서 해탈문에 이르는 넓은 공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주지를 지낸 응송스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무염지는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조를 조성한 독특한 곡지형태의 못으로, 목포 이훈동가옥의 일본정원을 설계한 일본인에 의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무염지 주변에는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후박나무 등과 같은 교목과 관목으로 눈향나무, 회양목, 꽝꽝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으나 나무가 정리되지 않아 경관적으로 혼란스러운 실정이다. 더불어 분수가 설치되고 부분적으로 석조도 교란된 것이 있어 보수공사를 서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Part2 자연계류를 활용한 사찰정원

한국에 불교가 도입된 직후에 지어진 사찰들은 거의 대부분 수도인 왕경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은 당시의 불교가 왕실·귀족불교 혹은 호국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전교(傳敎)의 필요성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불교사찰의 입지형식은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한국적 풍토에 대응하는 특징을 갖추게 되고, 사찰의 입지가 산지로 옮겨지게 된다. 산지사찰의 초기형태는 의상이 도당수학(渡唐修學) 후 삼국통일을 전후로 하여 짓기 시작한 화엄십찰(華嚴十刹)과 나말여초에 지어진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에서 화엄십찰은 삼국의 쟁패와 연관되는 입지성을 가지며, 구산선문은 중국의 선찰에서 공부한 유학승들이 선종의 종지와 부합하는 입지성을 갖추기 위해 산지에 자리를 잡았다.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바탕한 산지사찰 정원의 요소

초기의 산지사찰은 도선의 비보사상에 근거하여 입지를 선정하였다. 비보사상은 국내 산천 중에서 길지나 또는 비보상 중요한 곳을 택하여 사찰, 탑, 불상, 부도 등을 건립하고 각종 법을 수행함으로써 여러 불보살(佛菩薩)과 지신력(地神力)의 가호를 빌어 일체의 흉사를 사전에 방지하며, 모든 길사를 초래케 하여 나라와 백성 그리고 정법(正法)을 수호하려는 불법(밀교)적 법용(法用)을 말한다.

비보사상 또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서 자리를 잡게 된 산지사찰은 산수와의 구조적 상관성을 가장 중요한 택지의 원리로 삼고 있다. 그 중에서도 물은 보다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니, 그것은 물이 생기를 바람으로부터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 용맥을 양쪽에서 보호하고 인도하며, 더 나아가 생기를 멈추게 하여 한 곳에 모이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물의 중요성 때문에 풍수가들은 예로부터 혈을 찾고자 할 때 산을 보지 말고 물을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산은 정(停)하기 때문에 음으로 보며, 물은 동(動)하므로 양으로 본다. 음과 양이 서로 교배했을 때만 혈을 결지할 수 있는 음양의 관점에서 물은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물에는 길한 물과 흉한 물이 있다. 길한 물 가운데에서도 계간수(溪澗水)는 산중의 계류로 용혈과 가깝게 있으므로 풍수지리에서는 매우 중요시하는 물이다. 계간수는 반드시 굽어 흐르고(屈曲), 감싸 돌아 흐르고(環遶), 명당에 모여들고(聚注), 깊으면서도 조용하여야 좋고, 일직선으로 급하게 흐르거나(直急), 소리를 내며 흐르거나(溜聲) 달려 나가듯하면(峻跌) 좋지 않다. 대부분의 산지사찰은 기본적으로 계간수가 합수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계간수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풍수지리적으로 길한 물인 계담을 이용한 정원

풍수지리적으로 본 물의 의미에 근거하여 산지사찰은 사찰의 좌우측으로 계간수가 흘러내리거나, 한쪽으로 계간수가 흐르는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한 입지성으로 인하여 사역의 전면부로 물이 흘러 내려가는데, 이 물을 향수해로 해석되며, 계간수에는 다리를 놓아 성속을 연결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흘러가는 계간수도 중요하지만 고인 물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사역주변을 흐르는 계류를 인공적으로 막아 담(潭)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계담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비교적 많은 사례가 남아있는데, 이렇게 계담을 만드는 것은 풍수지리적으로 길한 물을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경관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 그리고 기능적으로 미기후조절을 위한 용도나 방화수와 같은 용도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산지사찰에서 풍수지리적으로 길한 물인 계담은 특히 못을 만들기 어려울 때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지당수(池塘水)와 녹저수(祿儲水)

길한 물에는 지당수와 녹저수가 있다. 물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길한 수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당수는 혈 앞에 고여 있는 물로 작은 연못이나 물웅덩이를 이른다. 이것은 혈 주변의 모든 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형성되기도 하고, 땅속으로 따라온 물이 혈 앞에서 지상으로 용출되어 형성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형성될 경우 항상 물이 깨끗하게 유지되면 길수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당수가 없을 경우 흐르는 계류를 막아 계담을 만들었는데, 이 계담이 바로 녹저수로, 이 물 역시 깨끗하게 관리하여야 한다. 혈의 전후좌우 물길에 담이 군데군데 있고 이것에 맑은 물이 가득 차있으면 길수가 되기 때문이다.

계담은 경관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결과, 계담에 물을 고이게 하여 주변의 삼라만상을 비치도록 하는 영지의 효과, 못물 특유의 시각적 효과, 계담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보를 통과하면서 물의 낙차를 이용한 폭포의 효과가 생긴다. 

주요 사례지

■송광사 정원

우화각(羽化閣) 계담

   
▲ 송광사 계담

우화각 계담은 오래전부터 송광사에 있어온 것으로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어 사찰정원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이 계담은 송광사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찰의 계담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으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아 풍수지리적으로나 경관적으로나 불교적 상징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있다.

   
▲ 송광사 계담에 비친 물상들

송광사 우화각 계담은 송광사를 휘돌아 내려가는 자연계류를 막아서 만든 것으로 대승선종조계산송광사(大乘禪宗曹溪山松廣寺)와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왼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계담이야말로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있는 몇 개 안되는 계담 가운데에서도 가장 수승한 수경관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특별한 개념의 사찰정원이다. 이 계담은 송광사의 남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휘감아 돌아가는 계류를 막아서 조성한 인공 못으로서 그 위에는 무지개다리 위에 회랑모양으로 길게 설치한 우화각이라는 수상누각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이 우화각에 오르면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에 쓴 대로 “날개 돋쳐 날아오르는 신선(羽化而登仙)”이 된 기분이 된다.

송광사 우화각 계담에는 육감정(六鑑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임경당(臨鏡堂) 건물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있다. 여기에서 육감정이란 육근(六根: 眼, 耳, 鼻, 舌, 身, 意)을 고요히 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비춰보는(鑑) 정자라는 의미일 것이고, 임경당 역시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이라는 뜻일 것이니 송광사 계담은 가시적인 현상만 비치는 영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비쳐볼 수 있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수경관요소이다. 이러한 송광사 계담에 대한 의미부여는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러한 정원이 곧 한국사찰의 한 유형인 선정원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수석정(水石亭) 계담

   
▲ 송광사 수석정 계담

우화각 계담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석정 계담이 있다. 수석정은 조선후기에 무용수연(無用秀然, 1651~1729) 선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정자인데,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전면 삼칸 측면 한칸 집이다. ‘무용당집’에 소개된 ‘조계산 송광선원 수석정기’에는 갑오년(1714) 여름에 겨우 한칸의 작은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석’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수석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즉, “수석은 내가 평생 사랑한 것으로 돌은 견고하면서도 고요하니 마음을 안정시켜 흔들리지 않게 하고자 함이었으며, 물은 흐르면서도 맑으니 만물을 대함에 걸림이 없고자 함이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도 또한 내가 사랑한 것인데, 항상 머물러 있음이 없으면서도 늘 그 속에 물과 돌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수석정 계담은 우화각 계담과 달리 주변이 온통 자연이어서 적정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정자는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자 만든 자리일 뿐 수석정 계담의 주인은 계담의 물과 반석이다. 이곳 수석정 계담을 보면, 수석을 대하며 본성을 보기 위한 수행에 용맹정진하였을 무용선사의 모습을 대하는 듯하다. 이곳은 송광사 스님들이 자주 찾는 숨겨진 정원으로 계담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이는 스님들의 협조를 받아서 방문하여야 한다.  

■백양사 정원의 계담

   
▲ 백양사 계담

백양사(白羊寺)는 백암산(白巖山) 자락에 자리한 고찰이다. 백암산이라는 산 이름은 산에 유독 흰 빛깔을 띤 바위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에 우뚝 솟은 백암산 봉우리를 백학봉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마치 학이 앉아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양사 들어가는 입구에는 비교적 넓은 규모의 계담이 형성되어 있다. 언제부터 이러한 규모의 계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계담을 바라보며 지어진 쌍계루가 1370년에 붕괴된 이후 1377년에 복구되었고, 지금의 쌍계루는 1980년에 복원된 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계담의 역사도 누각과 같이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381년에 쓴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白巖山淨土寺雙溪樓記)’에는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고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양사 계담의 기능은 다양하다. 풍수지리적으로는 녹저수나 지당수의 기능을 하기도 하고, 경관적으로는 백암산의 그림자를 물위에 비치도록 하는 영지의 기능을 하며, 기능적으로는 사찰에서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로 활용하기도 한다.

 

Part3 나무와 꽃을 중심으로 조성된 사찰정원

   
▲ 큰 법당 후면부에 조성한 화계(위에서 본 모습)

물을 중심으로 조성된 사찰정원이 있는 반면, 꽃이나 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도 있다. 불교에서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하여 향, 초, 꽃, 차, 쌀, 과일을 부처님께 올리게 되는데, 꽃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난 후에 피어나는 만행화(萬行花)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수행이나 장엄, 찬탄의 상징으로 쓰인다. 이러한 까닭에 꽃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으며, 그것이 곧 꽃이 피는 장소인 사찰정원을 만들게 되는 원인으로 연결된다.

사찰에서 꽃이 피어나는 장소는 연꽃이 피어나는 연지가 가장 대표적이며, 우리나라와 같이 사찰이 산지에 들어섬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적 특성을 활용해서 만든 화계가 있고, 불보살을 모신 불전 앞에 조성되는 화오가 있다. 이러한 장소에 꽃을 피우는 것은 결국 부처님께 꽃 공양을 하기 위한 것으로 오랜 역사성을 가진다.

화계나 화오에는 불교적 상징성을 가진 꽃들이 철따라 피고 지는데, 대부분 키가 높지 않은 목본류나 화색이 화려하지 않고 오래가는 초본류들이 도입되었다. 목본류로는 불두화, 매화, 수국, 목단, 철쭉 등이 대표적이고, 초본류로는 파초, 부처꽃, 작약, 나리, 국화, 난초, 붓꽃, 금낭화 등이 대표적이다.

주요 사례지

■봉선사 정원

   
▲ 봉정사 대웅전 석단 하부의 화오에 심어진 부처꽃

봉선사는 광릉의 원찰로 지어진 사찰로 세조의 어진御眞을 모신 어실각御室閣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봉선사 불사는 왕실에서 주관하여 진행하였는데, 건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경사면 처리를 위한 석단이나 화계에 장대석을 사용함으로써 격을 높인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속한 건물이 아니면 다듬은 돌(숙석, 熟石)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 민간에 의해서 지어지는 건축공간에는 장대석을 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봉선사는 사찰의 불사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봉선사 정원은 큰 법당 후면부에 조성한 화계와 범종각 전면에 조성한 화계 그리고 운하당과 방적당 석단 하부의 화오가 중심이 된다. 이들 화계와 석단은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형식과 재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국사찰정원의 특별한 사례가 되고 있다.

큰 법당 후면부에 조성한 화계는 장대석을 이용해서 3단으로 축조하였는데, 화계의 높이는 1단이 1.2m, 2단이 l.9m, 3단이 0.8m이고, 너비는 1단이 2.1m, 2단이 2.0m, 3단이 2.5m로 되어있다. 20여 년 전 처음 이곳의 화계를 조사했을 당시만 해도 화계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장대석이 튀어나오는 등 화계가 교란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다. 지금은 화계를 보수하고 이곳에 영산홍을 군식하여 봄이 되면 아름다운 경관을 접할 수 있다.

범종각 전면의 화계는 2단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단이 1.4m, 2단이 0.9m이고 너비는 1단이 3.9m, 2단이 1.7m이다. 이 화계에는 지금 회양목과 주목 등이 심어져 있어 경관적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우나, 지난날에는 기화요초를 심어 아름다움을 감상하였을 것이다.

   
▲ 운하당과 방적당 석단 하부의 화오
   
▲ 큰 법당 후면부에 조성한 화계(아래에서 본 모습)

한편, 운하당과 방적당 석단 하부의 화오에는 봉선화, 상사화, 비비추, 작약, 금불초, 꽈리, 옥잠화, 칸나, 범부채, 도라지, 좁쌀풀, 금계국, 왕원추리, 독말풀, 백일홍, 참나리, 겹삼잎국화 등과 같은 초화류들이 철따라 피어난다. 화오의 꽃은 불전에 꽃 공양을 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한편으로는 절을 찾는 이들에게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여 사찰에서 정원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아쉬운 것은 전통적으로 사찰에 심어온 우리 꽃뿐만 아니라 외래종이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선암사 매정

   
▲ 선암사 무우전 옆의 매정

매정(梅庭)이라고 이름 붙인 선암사의 정원은 두 그루의 선암매와 무우전 돌담에 붙여 열식된 20여 그루의 매화로 구성된다. 선암매는 강릉의 율곡매, 장성의 고불매, 구례의 화엄매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매화 중의 하나로,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그루의 선암매 중 하나는 백매 다른 하나는 홍매인데, 백매는 수령이 650년이나 되었다고 사중에서는 알고 있다. 이 두 그루의 선암매를 비롯해 수령이 300년 이상 된 20여 그루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사찰정원이 가지는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선암매는 다른 매화에 비해 조금 늦게 피어나므로 선암매가 꽃을 피우는 3월말이나 4월초에 가는 게 좋다. 그것도 해가 뜰 무렵이면 더욱 좋겠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선암매(백매)

<고려시대의 사찰정원>

지금은 그 자취를 볼 수 없고 문헌상에만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사찰정원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한국의 사찰정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먼저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의 사찰정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관란사의 북쪽 산이 초목이 없는 민둥산이었기에 김돈중 등은 인근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松), 측백나무(柏), 삼나무(杉), 노송나무(檜)를 심고, 기이한 꽃과 풀(奇花異草)을 심었다. 또 단을 쌓아 왕이 머물 방을 만들어 금과 푸른 옥으로 치장하고, 대(臺)와 섬돌은 모두 괴석을 사용하였다(又以寺之北山童無草木, 聚旁近民, 植松栢杉檜奇花異草. 築壇爲御室, 飾以金碧, 臺砌皆用怪石)”

완주 화암사(花巖寺) 정원에 대해서는 “못가에는 창포가 우거져 있고, 섬돌 앞에는 노랑목단이 활짝 피어 마당과 담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으며, 작약도 붉게 피어 중국 초나라의 미인 서시(西施)를 취하게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화암사 정원의 아름다움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수다사의 사찰정원은 이규보가 노래한 “그윽한 새가 물을 스쳐가며 푸른 비단을 가르니, 방지를 뒤 덮은 연꽃이 살며시 움직이네. 참선하는 마음(禪心)이 원래 스스로 깨끗함을 알려면, 청초한 가을 연꽃이 찬 물결에 솟은 걸 보소”라는 시에서 그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대흥사(大興寺)는 고려 태조 4년(921) 10월에 오관산(五冠山)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 사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에 실려 있다.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마당을 덮고, 목련이 피어 맑은 향기가 온 고을에 넘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황채(黃菜)가 물과 뜰을 아름답게 수놓으니 진가경(眞佳景)이 아닐 수 없다.”

안화사(安和寺)는 고려 태조 13년(930) 8월에 안화선원(安和禪院)으로 창건한 절로, 예종 때에 안화사로 재창하였다. ‘고려도경’에는 “산허리에 샘이 있는데, 맛이 달고 맑았다. 정자를 이 위에 세우고 그 샘물 이름을 안화천(安和泉)이라 하였으며, 주변에다 대나무와 나무를 심었다. 괴석을 배치하여 놀고 쉬며 즐기기에 알맞도록 꾸몄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사찰정원에 대한 이상과 같은 기록을 보면, 사찰정원은 물을 중심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나무와 꽃을 이용하여 만든 정원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art4 자연경물을 소재로 활용한 사찰정원

   
▲ ‘백의관음화현도’에서 보이는 상원사 정원

자연경물(自然景物)이라 함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관요소를 말한다. 한국사찰은 나말여초 이후 화엄십찰과 구산선문의 조성과 더불어 산지에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찰이 자리 잡은 곳은 경승지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거암이나 폭포와 같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경물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경물들을 사찰의 경역 내에서 정원요소로 활용한 것이 바로 자연경물을 소재로 활용한 정원이다. 그런데 사찰주변의 자연경물을 차경하여 만든 정원은 다수 있지만 경역 내에서 정원의 소재로 활용한 정원은 많지 않아서 이러한 유형의 정원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주요 사례지

■양평 상원사 정원

   
▲ 양평 상원사의 중심영역

양평 상원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로 선찰로서의 위상을 면면히 이어온 사찰이며, 지금도 경내에 용문선원이 있어 수좌들이 선수행을 하고 있는 곳이다. 상원사에는 ‘관음현상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책은 명나라 천순(天順, 세조 7년, 1462) 10월 庚寅(29일)에 세조가 중궁세자와 더불어 경기도 지평현(砥平縣, 현 양평군)으로 사냥을 나가서 미지산(彌智山, 현 용문산) 상원사(上院寺)로 행차했을 때, 담화전(曇華殿, 현 대웅전) 상공에서 흰 기운이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의 모습으로 화현(化現)하는 모습을 중추원 예문관 대제학 최항이 왕의 명으로 교찬한 기록이다. ‘관음현상기’에는 백의관세음보살이 화현하는 모습을 그린 ‘백의관음화현도’가 실려 있는데,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담화전에서 바라볼 때 좌측 당우의 후원에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데, 바위가 있는 공간을 담장으로 둘러 외부와 격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 암석은 크기로 볼 때, 어느 곳에서 의도적으로 옮겨 온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바위를 그대로 방치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하나의 경석(景石)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 양평 상원사 계곡의 암석군

한국에서는 사찰정원을 비롯한 어떤 정원에서도 이렇게 자연적인 경물을 정원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곳은 없다. 물론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을 암경으로 차경하거나 그 주변에 인공요소를 도입하여 경관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으나,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자연요소를 담장을 둘러 의도적으로 경관요소로 활용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형식은 일견 일본의 선찰에서 볼 수 있는 선정원인 평정고산수양식의 정원과 유사한 개념으로 보인다.

   
▲ 봉정사 영산암 마당

물론 일본 선찰의 선정원인 고산수양식의 정원은 특별한 대상, 예를 들면 후지산이나 세토내해의 섬 등 자연경관이 훌륭한 곳을 모티프로 삼아 축경양식으로 만드는 것으로 상원사의 경우와는 정원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돌이나 모래로 만든 형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상원사의 암석원은 마당에 있던 큰 바위를 하나의 경물로 삼아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 특별한 정원형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조선 초기 상원사에 볼 수 있는 이러한 정원은 일반적인 공간에서 연출하기는 어렵고 선찰에서나 가능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의관음화현도’에서 볼 수 있는 자연경물을 소재로 활용한 상원사 정원은 지금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상원사 주변에는 아직도 커다란 거암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지난날 상원사에 존재했을 정원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봉정사 영산암 정원

   
▲ 영산암 바위와 그 위에 붙어 자란 소나무

봉정사 영산암(鳳停寺靈山庵)은 봉정사의 부속암자로 응진전·영화실·송암당·삼성각·우화루·관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봉정사영산암향로전창건기'와 '봉정사영산전중수기' 등의 사료로 보아 19세기 말인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암은 우화루(雨花樓)라는 당호를 가진 문루를 통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문루를 통과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마당이 나타나는데, 이 마당은 지형의 고조차를 이용하여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주불전인 응진전과 서쪽으로 삼성각, 영화실이 배치되어 있고, 중단에는 관심당과 송암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하단에는 우화루가 놓여 있다. 마당 상단과 중단 사이에는 기존의 바위를 이용해서 동산을 만들었으며, 이 동산에는 자연스럽게 자란 소나무 한그루가 있어 경관요소로 한 몫을 하고 있다.

바로 이 바위와 바위 위에 자연적으로 자라난 소나무가 자연경물인데, 거기에 와편으로 만든 난쟁이굴뚝이 맛을 더한다. 우화루 누마루에 앉으면 마치 정자에 앉은 것과 같이 문틀사이로 영산암 마당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보이는데, 동산의 소나무와 응진전 앞에 조성한 화계에 철따라 피어나는 꽃이 조화를 이루어 선정원으로서의 개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래전 상영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무대가 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글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한국사찰정원을 못이 중심이 되는 정원, 자연계류를 활용한 정원, 나무와 꽃을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 자연경물을 소재로 활용한 정원으로 유형화하여 각 유형별로 대표적인 사찰의 정원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의 사찰정원은 풍수지리적인, 경관적인, 그리고 불교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초기의 불교사찰이 못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만든 정원이 많았다면, 사찰의 입지가 산지로 옮겨 간 고려,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자연계류를 활용하여 물을 도입하고, 경사지형을 정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절토면을 극복하기 위해 화계를 조성하거나 불전 기단부에 붙여서 화오를 조성하였고 심지어는 자연경물을 활용하는 등 매우 다양한 유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연경물을 정원의 요소로 활용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사찰정원은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한국사찰정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된다. 특히 경역 내에 있던 기존의 바위를 활용하여 정원을 만든 상원사의 경우는 일본의 가레산스이 정원과는 또 다른 정원의 유형으로 생각되어 한국사찰정원의 지형이 매우 넓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정원 이외에도 차경수법을 통해 주변의 자연을 정원으로 삼은 경우도 다수 있지만, 이 경우는 해석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는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둔다.

한국불교가 억불숭유라고 하는 조선시대의 국가정책에 의해 교세가 위축되면서 사찰에 정원을 조성할만한 여유는 물론 기존의 정원마저도 관리되지 못할 정도가 되어 많은 정원이 멸실된 것은 한국불교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기존의 사찰정원에 대한 지속적인 유지관리는 물론 도심에 지어지는 현대사찰에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개념의 사찰정원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언하면서 끝을 맺는다.

 

글 사진 홍광표 동국대 조경학과 교수‧한국정원디자인학회 회장

홍광표 교수 동국대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를 받았으며,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에서 근무하였으며, 1984년부터 동국대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조경학회 부회장,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정원디자인학회 회장으로 있다. 한국의 전통정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연구에 천착하고 있으며, 그것을 ‘K-Garden’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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