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차트 가든에서 온 편지] 물망초의 겨울나기 :: 한국조경신문
2017.12.15 금 11:55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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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트 가든에서 온 편지] 물망초의 겨울나기
봄을 준비하는 그대에게
[0호] 2017년 01월 05일 (목) 11:02:44 박상현 shpark0825@gmail.com

[월간가드닝=2016년 12월호]

   
▲ 물망초가 심긴 사이에 튤립과 수선화 구근을 심는 부차트 가든 정원사들

김 국장 보게나.

어제 막 가을 꽃 심기가 끝났네. 족히 한 달을 정신없이 보냈어. 여름내 화단을 울긋불긋 수놓았던 꽃들을 뽑아내고 흙을 갈아엎어 내년 봄에 피울 꽃들을 심었다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도, 서리가 내려 손발이 시린 쌀쌀한 날에도 쉴 틈이 없었다네. 비가 오면 우비와 장화를 신고 화단으로 나가야 했고 손발이 시리면 두툼한 장갑에 양말도 한 겹 더 신어가며 일을 했어. 무릇 생명들에게는 때가 있는 법이라 더 추워지기 전에 꽃 심기를 마쳐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어.

부차트 가든의 가을 꽃 심기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네. 몇 가지의 물망초(Myosotis)나 데이지(Bellis)를 먼저 심은 뒤 그 사이사이에 튤립이나 수선화 같은 구근식물을 심으면 되거든. ‘나를 잊지 말아요(Forget-Me-Not)’라는 이름을 가진 물망초와 언뜻 보면 시금치를 닮은 데이지. 흔한 한해살이 꽃들에 불과한 이 녀석들은 눈보라치는 겨울을 꿋꿋이 견뎌내며 흙속에 웅크리고 있는 구근들을 든든하게 지켜낸다네. 뿐만 아니라, 황량한 겨울 화단이 그나마 초록색으로 덮여있는 것도 바로 이 자그마한 꽃들 덕분이야. 참 고맙고 대견한 생명들이지.

봄이 되면 물망초는 하얗거나(Tall White), 파랗거나(Royal blue, Ultramarine), 분홍색(Rosilva) 꽃을 피우지. 데이지는 분홍(Pom Rose), 흰색(Tasso White), 또는 빨강(Bellissima) 꽃을 피워낸다네. 어제 마지막으로 심은 화단은 여름에 달리아가 화려하게 피어있던 꽤 넒은 곳이야. 여기에는 분홍과 파란색 꽃을 피우는 물망초를 1:1로 섞어 심고 그 사이에 분홍빛이 나는 튤립(Elegant Lady)과 진한 자주색(Havran) 튤립을 흰색 꽃이 화사한 수선화(Sailboat)와 함께 심었어.

이제 남은 일은 봄이 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야.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다시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면 이 꽃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나 화단 가득 봄을 채운다네. 자연의 섭리를 따라 우리 정원사들이 미리 준비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지.

   
▲ 물망초가 먼저 심긴 화단에 튤립과 수선화 구근을 심기 전에 골고루 배열하는 정원사

김 국장!

자네에게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은 건 순전히 며칠 전 주고받은 문자 때문이야. 내가 이곳에서 정원사로 살며 취미삼아 했던 연어낚시 경험을 모국의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책으로 엮어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오랜만에 연락을 했었지.

“나랏일이 정신없는데 이 판국에 나는 책을 냈다.”

“ㅎㅎ 축하혀!!!”

더불어 나는 자네의 안부를 물었고 “늘 그렇지!”라는 대답을 접했을 때만해도 “대단하다 참. 너의 그 항상심은 깊은 바다 속 같아!”라고 응원해줬지. 그러나 자네의 그 다음 문자를 읽고선 나는 바짝 긴장했어.

“그런데 요즘 많이 피곤해. 늘 졸리고 몸이 힘들어. 쉰 고개 넘어가기 숨차서 그럴 거라 생각해.”

20년 가까이 알고 지내며 자네에게서 이런 하소연을 듣는 게 처음인 것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몸도 마음도 정말 많이 지쳐있구나 싶었거든. 같은 회사에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동고동락하다가 비슷한 시기에 나는 짐을 싸서 이곳에 왔고, 자네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방송채널을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나는 내심 자네가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구나 싶었네. 자네의 건강이 염려스러웠어. 그날 밤 나는 퀭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자네 얼굴이 눈에 밟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네.

한 해가 또 저물어가네. 새해가 되면 동갑내기인 우리가 지천명에 들어서게 되겠지. 자연의 순환으로 치자면 아마도 가을 문턱을 넘어선 셈일 거야. 나는 김 국장 자네를 믿어.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인생의 씨앗을 뿌리고 키워냈으니 풍성한 가을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당연히 추운 겨울도 걱정 없이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을 좀 내서 여기를 다녀갔으면 좋겠어. 자네와 어깨동무하고 물망초와 튤립이 만발한 정원을 함께 걷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으려니 빨리 봄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네.

   
▲ 부차트 가든에 설치한 크리스마스 트리용 조형물. 화단에 심긴 봄꽃들이 춥고 긴 겨울밤을 이겨내는 동안 환하게 불을 밝혀 이들을 응원해 준다.

박상현(부차트 가든 정원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터><연어 낚시 통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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