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락원(명승 제35호)

성락원 주변은 계곡이 깊고 수석이 맑으며 도성에서도 멀지 않아 세도가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동국여지비고의 한성부 명승편을 보면 “북저동으로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마을에 복숭아 나무를 벌려 심어서 봄철이 되어 복숭아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꽃구경을 하여 민간에서는 도화동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성락원은 조선 철종 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서를 기원으로 하고 있으나 그가 정원을 경영한 시기는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영벽지 암벽면에 새겨진 금석문에는 ‘영벽지 해생 백천회불류 위소벽 란두 자오득 차수 소작강호유 계묘오월손문학서’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해생’이라는 호를 사용한 사람은 황윤명으로 매천야록에 수록된 ‘수십 년 동안 내시들 중에 총애를 받아 기세를 부린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21년 발행된 조선지형도에는 ‘이강공별저’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성락원은 심상응 이후 황윤명과 이강공으로 이어지는 소유주의 변화를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50년 4월 심상응의 4대손인 심상준이 다시 성락원을 소유한 이후 현재까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전통정원으로서의 면모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지형도에 기록된 성락원 모습은 본재와 영벽지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영벽지 주변에는 석축과 물길이 표시되어 있다. 그후 1961년 6월 2일 동아일보에는 ‘현대식 종합공원 시범관광지역으로 한창 공사 중’이라는 기사가 나타나는데 영벽지와 계류 이웃에 축대와 도로가 생기고, 수각정(지금의 송석정)이 새로 지어지는 등 현대 위락시설 개념의 정원으로 변화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는 심상준이 ‘성 안의 낙원’이라는 뜻의 성락원을 새로운 정원의 명칭을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정원을 조영했다. 이후 2008년 문화재청의 ‘성락원 복원화사업’에는 쌍류동천 및 영벽지 계류복원과 석축 등이 재현되었다. 견치석 호안 등 석축 해체 후 계류 원형을 찾아 복원작업을 실시하던 중 영벽지 일원에 숨겨졌던 폭포형태의 암반부와 연못의 기능을 하는 물확형태의 석조를 발견했다.

또 성락원의 진입부인 용두가산과 쌍류동천에 견치석을 제거하고 자연석으로 재조성하였고 물길을 새로 조성했으며, 주변부에 2개의 석교를 새로 놓았다. 정원 내를 통과하던 길들은 모두 제거되고 송석정 앞면 도로는 자연석축으로 축조했다. 이는 살림집으로 향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으로 기존의 정원구획과는 달리 자연암반을 중심으로 한 계류형 정원으로 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성락원은 과거 자연계류형으로 회귀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성락원은 서울의 도시화, 소유주의 취향에 다른 원형 훼손 등 열악한 여건 중에서도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온 도심 속의 정원으로 자연계류형으로 전통기법의 전승과 당시 조경양식의 가치를 재발견 할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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