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문화의 불모지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90년대 초. 한국 손바닥정원연구회를 이끌며 한국 정원문화에 꽃을 피운 홍경숙 원예예술촌 회장은 지난해 4월 4년간의 공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숨 가쁘게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올해 개장한 지 7년 된 남해 원예예술촌의 비전과 앞으로의 과제 등 홍경숙 회장을 만나 보았다. 아울러 홍경숙 회장은 2016 코리아가든쇼에서 국내 정원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정원문화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여했다.

▲ 홍경숙 원예예술촌 회장

지난해 유료관람객이 37만 명을 넘어섰다. 원예예술촌 개장 이후 급성장을 해 오고 있는데 이유가 무엇이라 보는가.

지난해에 37만 명을 넘었는데 2014년에는 40만 명에 육박하는 관람객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메르스 사태로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6년이라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대개 정원들이 정원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우리는 현재 21가구 중 집에 딸려 있는 정원만 11곳, 공동정원으로 조성된 곳이 9곳이다. 개인 주택에 정원이 21개라는 것은 일반인에게 그림 같은 정원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내 집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나 연상시킬 수 있어서 많은 분들이 공감하며 감상을 하시는 것 같다.

 

손바닥정원은 어떤 모임인가?

손바닥정원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 한 땅이 있으면 정원을 가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취지에서 정원 가꾸기를 계몽하고, 디자인이나 실제 예를 보여줘 가드닝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함께 1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열었다.

손바닥정원이라고 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 당시 건물에 1000평 정도의 여유있는 땅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전시회를 하려면 적어도 20여 개 정도의 정원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크게 정원을 꾸미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작은 규모이자만 나름대로 깊이 있고, 다양한 정원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것을 작은 것에 비유하듯이 정원 가꾸기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을 없애기 위해 작은 실천을 하는 모임이다.

모임은 언제 구성됐나?

첫 번째 전시회를 1994년에 가지면서 공식적인 출범을 알린 계기가 됐다. 98년까지 매년 행사를 가졌고, 현재까지 모임은 20여 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모두 이곳에서 있는 관계로 별도의 전시회는 갖지 않고 있다.

당시에는 마당이 없는 집에서도 꽃을 가꿀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기 위해 해마다 다른 콘셉트로 전시회를 진행했다. 어떤 해에는 베란다 정원을 보여주고, 어떤 해에는 옥상정원을 보여주는 식으로. 나름대로 정원 가꾸기를 노력하고 알리는데 주력했다.

초창기 멤버는 어떻게 구성했나?

내가 가든스쿨을 하면서 숙련된 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재미가 있어서 참여한 분들이 전부였다. 나중에는 전문가들이 돼 같이 작품을 만들어가고 했는데, 당시 회원만 100여 명 정도 있었다.

손바닥정원이 현 정원문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게 어려운 집이든 유복한 집이든 싸리울타리 있는 곳에 호박넝쿨이나 나팔꽃을 올린다든지 댓돌 위에 맨드라미, 백일홍 등 잘 안 죽는 꽃들을 보며 자랐다.

현대에 이르러 주거문화가 바뀌면서 아파트 등으로 변해 이러한 문화를 지속시키는 것은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다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베란다에서 가꾸고, 옥상에서 가꾸는 등 많은 변화가 있다.

손바닥정원을 이어오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당시에도 독창적인 분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빨래정원이라는 것도 선보인 적이 있었다 원래 서양 사람들의 빨래정원은 허브와 같이 익숙하게 접했던 주부들이 허브 위에 빨래를 널어 말렸는데, 허브향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때는 망초를 이용했는데 빨래정원을 만들었다. 빨랫줄에는 아이 운동화와 아빠들 런닝 셔츠를 널어 굉장히 재미가 있었다. 또한 빨래지지대에 줄장미를 심어서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첫 전시회는 당시에 가든하우스 글로리와 스쿨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최를 했지만, 그 이후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됐다.

첫 전시회에는 우리 작품들을 보기 위해 멀리 제주도에서 온 이도 있어서 감동과 보람을 크게 느꼈다.

▲ 홍경숙 회장은 손바닥정원연구회를 조직하여 90년대 초 정원문화를 알리는데 노력했다.

조경을 접하게 된 계기는?

원예학과를 전공했다. 그 당시 졸업한 2년 정도의 선배들이 먼저 한국에 테라리움과 실내정원 방법 등을 소개했는데, 그러한 움직임에 흥미를 느껴 함께 하게 됐다.

이후 조금 더 많은 정원을 보기 위해 외국을 많이 다녔고, 외국 전시회나 박람회는 물론 정원으로 유명한 곳은 빼먹지 않고 다녔다.

원예예술촌의 미래는?

우리 마을의 성격은 집과 정원을 하나의 작품처럼 잘 다듬고 가꾸는 것이다. 잘 유지를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품이나 꽃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며 정원 가꾸기가 더욱 확대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또한 국제교류를 통해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지금보다 발전된 모습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더 다듬고 보완할 점을 찾아가고 있다.

끝으로 한 마디

남해를 처음 왔을 때 자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2005년 당시만 해도 남해를 찾는 관광객이 2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주 관광 대상이 자연이었다. 나 또한 자연에 반한 것을 그들도 느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여기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구성돼 제주도보다 1/4 면적이면서도 해안선은 8배나 길다고 한다. 또한 남해를 지켜 온 분들이 난개발을 바닷가 쪽에는 하지 않아 바다 옆에는 농토가 형성돼 있어서 늘 푸르른 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 위대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원예예술촌도 이러한 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며, 책임감을 느끼고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지역 사회에는 공헌할 수 있는 원예예술촌이 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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