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도 운림산방(명승 제80호) <사진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양의 고정원은 시정화의(詩情畵意)라 해서 시와 그림 가운데 묘사된 내용이 인간에게 심원한 미적 정취를 주는 현상 즉, 의경(意景)의 미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정원은 건축, 산수, 화초, 수목 등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독특한 경관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을 예술적 경지로 표현하는 화가가 직접 정원을 조성한 경우 그 가치가 남다르다.

운림산방은 남화의 대가이던 소치 허유 선생이 만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이다. 운림산방은 바로 조선말과 근대를 살다간 화가의 정원이다. 그의 저서인 ‘소치실록’과 ‘운림잡저’ 등에 조성 관련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선생은 시, 서, 화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칭송되었는데, 20대에 대흥사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워 남화의 대가가 되었다. 특히 헌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을 얻고 왕실 소장의 고서화를 평하기도 하였다. 또 서울 고관대작의 집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는데 서울 석파정 정원에 관한 기록은 당시 정원의 원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남았다.

운림산방은 철종 8년(1857)에 소치가 귀향하여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초옥과 연못이 중심이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본채와 사랑채인 화실, 유물전시관 건물과 연못, 괴석과 탑, 형형색색의 정원수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다. 운림산방의 배후에는 첨찰산이 둘러 있고 이웃에 쌍계사가 있다.
산방 전면부 연못은 원래 사다리꼴 형태로 입출수는 북동에서 남서로 되어 있었으나 남농이 퇴락된 정원을 일으켜 복원할 때 사다리꼴에서 방지에 가깝게 다듬어졌다. 연못 중앙 섬에는 배롱나무가 운림산방이 경작지로 변했을 때도 남아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 남아있다. 남농이 산방을 기와로 고쳐지을 때 지금의 정원공간이 만들어졌는데 아름다운 화목과 괴석 등을 그때 구입하고 기증받아 조성하였다.

소치가 운림산방을 조영할 때와 변하지 않은 것은 초옥에서 바라보는 연못과 섬안의 배롱나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전시관과 정원이 하나의 박물관처럼 연계된 공간으로 꾸며있어 옛 소치가 누렸던 소박한 정원의 모습은 크게 변형되었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등 4대에 걸친 전통 남화의 성지이다. 그리고 소치의 초기 정원조성이 이루어진 화가의 정원으로서 명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자연문화재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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