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임업진흥원에서는 ‘2015 임업수기공모전’을 열어 수상작 5편을 선정했다. 농림업의 6차 산업화와 조경산업의 미래비전을 위해 한국조경신문에서는 2회에 걸쳐 최우수상(제356호 7월 9일자 13면)과 우수상 작품을 싣는다.

 

우수상 : 황현 임업인, 편백림 조성

 

▲ 임업수기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황현 임업인

 

▲ 1962년 야간 도벌 및 주간 도벌 순찰 중

 

▲ 1962년 조림지 전경

헐벗은 돌산만 골라 나무를 심고 가꾼 지 80여 년. 나는 지금 3대째 조림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집안이 심고 가꾸어 온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산 일대는 편백, 황금편백, 소나무, 해송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 집안이 조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제의 수탈이 심했던 1935년부터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창원군 산림계 직원에게서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돈은 재산 가치가 없지만, 산에 나무를 심으면 나무와 토지의 재산적 가치는 영원히 유지된다”는 말을 듣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산 306번지 일대 야산 3만5000여 평을 매입하여 편백을 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께서 심은 편백은 이제 수령 80년의 울창한 수림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나무 사랑은 아버지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조림지를 11만 평으로 늘리고, 낙엽송, 해송, 황금편백 등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수종과 유실수인 밤나무를 체계적으로 심었다.

‘나무는 스스로 체온을 갖고 호흡하며 용도에 따라서는 콘크리트나 철보다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신을 3대째 이어가고 있다.

어릴 때 나는 주워온 자식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산에 나무를 심고, 논밭을 매는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형, 동생들에게는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나에게만 이런 험한 일을 시키는지 당시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교통도 열악했던 시절이라 산에 가려면 먼 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도착해서는 나무를 심고, 퇴비를 뿌리고, 물을 날랐다. 정말 고역이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전혀 소득이 없어 보여 더 화가 났다.

형은 초·중등학교 600명 중 전교 10등 안에 드는 모범생이었다.

어느 날 형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동생인 네가 집안을 위해 그렇게 희생하는데, 형인 나는 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것은 돈보다 더 중요한 정신이다” 그때는 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새참을 사오라는 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 밭에서 일하던 동네 어르신을 만났다. “내가 어렸을 적 자네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을 때, 심부름해서 공책 값을 받곤 했단다. 그때는 나무가 있으면 땔감을 하기 바빴지 나무를 심는 사람이 없었어. 왜 나무를 심느냐고 물었지”라며 운을 떼셨다.

“자네 할아버지께서 하는 말씀이 ‘나무는 내가 잘살자고 심는 것이 아니야. 나는 아버지께 가난을 물려받아 무척 고생했지만, 내 자식과 자손들은 나처럼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잘살 수 있도록 나무를 심는 것이야’라고 하셨어.”

이 말씀을 듣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나 자신의 힘들고 고달픈 것만을 생각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우리 자손의 앞날을 위해 인생의 목표를 결정하고, 그렇게 살고자 애쓰셨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 자식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피와 땀과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무를 심는 것은 정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겨우 이해했다.

당시엔 독림가(篤林家)를 독립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림사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자손에게 물려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나는 독립군의 길을 선택했다.

1987년 태풍 셀마의 내습으로 현동 산 일대의 편백들이 쓰러지는 바람에 이것들을 모두 베어내는 아픔을 겪었다. 편백은 뿌리가 약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 때문에 태풍이나 강한 바람에 아주 약하다.

나무가 무참히 쓰러진 광경은 마치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은 모습이었다. 다시 그 자리에 편백 500그루와 황금편백 1200그루, 대추나무 등 혼합 조림을 했다. 이 작업은 마치 전쟁 복구를 하는 것과 같이 힘들고 고된 과정이었다.

이후 1990년 임업후계자로 선발되었고,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 2.5㎞의 임도를 개설해 임업기계화와 산지 자원화에 매진했다.

그린벨트 산에 임도를 개설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그 당시 마산시 산림과의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으로 마산의 그린벨트 산에 자비를 부담하여 임도를 개설했다.

힘든 노력의 결실도 있었다. 3대가 나무를 심었다고 인정되어 1997년 농림부 장관 표창을 받았고, 2001년 식목일에는 산업포장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2002년에는 산림청에서 선진지 견학을 보내 주었다.

독일의 흑림지대를 보는 순간,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독일의 흑림지대도 인공조림이었다. 인공조림의 특성은 침엽수 위주로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하지만 태풍이나 병충해, 산불 발생 시 피해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발견되어 침엽수 70%, 활엽수 30%로 변경했다고 했다. 우리 산도 편백 위주로 심어서 태풍에 취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이드는 독일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 임업 공무원과 산주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은행원이나 회사원이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참 의외였다. 공무원이 왜 좋은 직업이냐고 물었다.

독일은 소득세 10%, 종교세 10%, 통일세 20% 등 50%가 세금이다. 소득이 높으면 세금이 많아서 받는 월급은 다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는 임업 공무원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선진국일수록 공기 오염과 환경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조림사업을 국민의 정신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환경산업으로 인식하여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우리도 조림사업을 단순하게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업이 아니라 생명산업으로 인식하고 전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림사업은 가장 안정적인 재테크 수단이 될 수 있다. 80년 전, 산 1평 가격은 불과 몇 원에 불과했다. 지금은 마산의 그린벨트 산도 공시 가격이 평당 1만2000원 정도 한다. 단순 가치로도 만 배 이상 오른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과 미래를 위한 투자다. 그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다시 자손을 위하는 훌륭한 정신을 가진 국민으로 성장할 것이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우리 자손과 나라를 위한 희생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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