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애(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서울의 상징 남산은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전락했다’ 칼럼을 통해 소개한 적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남산의 힘’ 전시 내용 중 이런 표현이 있었다.

같이 관람하던 관장에게 ‘전락’이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물었다. ‘공원으로 변화했다, 혹은 공원으로 조성했다’로 표현해도 의미는 전달된다. 물론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서울의 산을 일제가 함부로 개발했다는 함의를 전달하고자 ‘전락’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공원 태동기에 공원화 과정이나 그 변화를 ‘전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공원 관련 문헌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공원이 자연의 훼손이나 무분별한 개발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일까. 근대 공원의 태동기가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시기였다는 점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

한국에 공원이 어떻게 도입되기 시작했는지 살펴보면서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헐버트는 ‘한국인들은 공원이라든가 공공의 장식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그림 같은 계곡이나 산허리를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좋아 한다’라고 묘사했다. 비숍 여사를 비롯한 서양인의 기행문에도 도성 내부는 불결하고 낙후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아름다움과 그 활용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있다. 굳이 도시 내에 인공적인 공원을 조성하지 않더라도 가까운 산이 공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필자의 기억 속 공원은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이 유일하다. 그 밖에 놀러 간 곳은 남산 팔각정, 창경궁, 덕수궁 등이었다. 밤 벚꽃놀이나 놀이 기구타기, 동물이나 희귀한 식물 구경하기, 사진 찍기 등을 하고 놀았다. 중·고등학교 때 소풍은 주로 태릉, 서오릉 등 무덤으로 갔다.

돌이켜보면 희한한 풍경이다. 무덤 옆에서 도시락을 먹고 보물을 찾거나 반 대항 장기자랑을 했다. 여름엔 계곡에 놀러가고 겨울엔 논을 얼린 곳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만국기만 매달면 동네 아이들이 노는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주변 자연이나 궁궐, 왕릉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한 레크리에이션 장소였다. 한국에서 공원을 전문가가 설계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공원을 조경가의 이름과 함께 기억하기 시작한 때는 1980~90년대 이후부터다.

근대 태동기에 한국의 공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서구의 공원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공원은 서구 공원 개념을 처음 접목해서 조성한 사례지만 당시 여건상 완성되지 못한 데다 도성 밖에 있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은 아니었다.

독립협회 주최로 독립 공원에서 집회가 예정되었지만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 덕수궁 근처나 종로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공원보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쉬운 가까운 광장이나 대로가 더 매력적인 오픈 스페이스였다. 역사를 바꾼 한국의 굵직한 사건들이 길이나 광장에서 이루어진 이유다.

도시계획상 공원에 관한 첫 기록은 일제가 작성한 1925년 ‘경성 도시계획 조사자료’다. 이는 1940년 경성시가지계획 공원 결정 고시를 작성하기 위한 첫 조사서로서 당시의 공원 현황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당시 경성의 공원으로는 남산 공원, 장충단 공원, 훈련원 공원, 사직단 공원, 효창원 공원, 파고다 공원, 만철 공원 7곳이다.

남산은 자연의 일부를 공원 용지로 임대하여 조성한 것이며 장충단, 사직단, 효창원은 제단이나 묘지다. 훈련원은 조선시대부터 군사 훈련과 무과 시험을 보던 장소였다.

만철공원은 조선의 철도사업을 위탁받은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공원으로 사원의 운동회가 열리는 등 운동장의 기능을 하는 장소였다.

파고다 공원은 원각사 터로 십층 석탑과 원각사비만 남기고 폐허가 된 곳이었다. 최초로 지정된 공원의 장소성을 분류하자면 자연, 제단이나 묘지, 운동장, 광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원 용지를 선정해서 전문가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활용해 오던 장소를 공원으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태동기의 공원은 대규모 토목 공사로 인공 호수를 만들거나 산을 깎아 광장을 만들거나 하는 서구의 방식이 아니다.

산에서 전망이나 산책을 하고 평탄지에서 운동회나 이벤트가 열렸으며 접근이 용이한 빈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집회나 휴게 장소로 활용했다. 대체로 기존의 토지 이용을 존중해서 최소한의 편의 시설인 벤치와 퍼걸러 등을 배치하고 소나무나 화훼류로 장식하는 정도였다.

한국의 공원 개념은 기존의 자연 여건과 토지 이용 현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입되거나 사적지와 인프라스트럭처의 활용이 공원 기능을 대신하면서 태동되었다.

전락이라는 표현은 공원이 기존 장소와 동거하면서 태동된 탓에 자연과 인공, 보존과 활용과 같은 상반된 가치들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결과다.

자연을 존중하고 벗 삼아 놀던 공원 문화는 서구식 공원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있었고, 한국적 특수성을 가지고 변화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국의 공원은 자연과 인공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현대의 공원은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녹음을 즐기고 휴식하는 곳이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으로 확대되고 있다.

공원은 기존 장소의 가치를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더 나아가 도시 전체를 재생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태동기가 그랬듯이 진화 과정에도 한국형 전략이 필요하다.

서영애(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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