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를 향해 한 순간 시선을 돌린 데에는 그가 꺼낸 “공동체는 이 시대 구원의 키워드”라는 부드러운 일침 때문이었다. 행정자치부 주최 공동체발전국민포럼에서 좌장을 맡은 이 교수는 공동체에 구원이라는 덜어낼 수 없는 무게를 올려놨고,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시대정신을 집약해 보여줬다. 공동체 회복을 향한 마을 만들기 불씨가 시나브로 번지고 있는 요즘, 이 교수가 부연해줄 무언가가 더 있을 듯했다. 내심 학문적인 얘기를 듣겠거니 예상했는데 이게 웬걸. 9월 24일 연세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자신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아름다운 마을을 만드는 예비 촌장이라고 소개했다. 무슨 얘길까?

▲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만들 마을 풍경을 보여주겠다며 손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마을을 만든다는데?

그렇게 생각한 건 5년, 터를 구입한 건 4년 됐다. 준비기간으로만 따지면 10년 전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국토를 느끼고, 저만의 택리지를 만들고, 어디에 살지를 고민했다. 그런 끝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내년 3월부터 동네를 만든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건축가 조정구씨 설계로 흙하고 나무 등으로 만든 자연친화적인 집을 지을 거다. 우선 초에 일곱 집이 들어서고, 그 다음 열 집 가량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민회의는 작년부터 했다. 학자들 중심인데, 교수가 스물 한 명인가 그렇다. 나머진 의사, 사업가도 있다. 의기투합할 사람들을 찾아 나선 게 수년이 지나 어느덧 열여덟 가구에 이르게 된 거다. 신기한 건 마을 지명이 학자들과 인연이 깊은데, 내년과 후년 학자들이 대거 이동한다는 셈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보석과도 같은 마을을 만드는 걸 꿈꾸고 있다. 원래 살며 농사짓는 원주민이 10여  분 계신데, 이 분들과 함께 유기농 농사도 짓고, 농산물 팔아 마을 소득도 올리고, 때 되면 음악회도 열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물론 마을 풍경을 담은 갤러리도 열고, 젊은 대학생들이 배낭여행하러 왔다 차도 얻어 마시는, 그런 미술관 같은 마을을 만드는 게 꿈이다.

풍경도 궁금하다. 어떤 곳인가.

잠깐만, (손전화기에서 사진을 보여주며) 지극히 평범한 시골마을이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정적이 흐르는 산골, 깡촌 같은 곳이다. 처음 이 마을을 보았을 때, 함께 사는 주민들이 잘 살 수 있겠다, 가꾸면 꽃송이가 되겠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애초부터 절경만 기가 막힌 곳을 원하지 않았다. 평범하되 자연이 파괴되지 않은 마을을 찾은 거다. 이곳은 도로가 못 지나간다. 도로가 없고 막다른 산이다. 그만큼 강원도에선 오지 다음으로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올림픽 도로에서 38km떨어진 것이다.

▲ 이 교수가 보여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소재 마을 풍경<사진 제공 이종수 연세대 교수>

어떤 계기로 마을을 만들고자 한 것인지?

휴일마다 전국을 돌 당시 세상 말로 출세하는 것 말고, 제 직업인 학문적으로 이바지하는 것 말고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정책을 상대하고, 정부를 상대하고 마을을 상대하고 학생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이거구나 싶었던 것이 자연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가꾸는 마을을 만들자는 거였다.

현재 우리나라는 마을이 있지만, 겉껍데기만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을이 있는데 마을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시골마을로 치면 이장 나이가 60이 넘었다. 연령구조로 볼 때 마을은 이미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후속 세대가 끊겼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중장년층, 청년층이 없다. 이를 정상적인 마을이라고 어떻게 얘기하나? 게다가 우리나라는 삶터, 집터를 잃어가고 있다.

삶터, 집터라고 한다면…?

영국을 예로 들면, 그 나라는 알다시피 가드닝 천국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딸 당시, 영국은 식민지 마흔 개를 다 잃어버리고 남은 건 가드닝 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정도로 그 곳 사람들은 아침에 세 시간, 저녁에 세 시간을 정원 안에서 살고 있었다. 가드닝이 삶터이자 집터였던 거다. 서로 존중하고 웃고 행복을 선사하는 하나의 통로로서 구실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건축물, 집 같은 게 일제강점기하고 6·25를 거치면서 아름다움이 뿌리째 파괴돼가고 있다. 시체를 밟고 죽이고 서로 할퀴면서 심상에 있는 아름다움마저 무너져버린 듯 아름다운 동네를 만드는 데 인색하기 그지없다. 아름답지 않은 것과 환경을 파괴하는 것과 부패는 동의어다. 다 한통속인거다. 썩었고 부패하기 때문에 아름다워야 할 삶터, 집터를 파괴하는 거다.

특히 충북 청원군 용계리 248번지에 나고 자란, 시골 출신인 나로서는 한국이 콘크리트 무게로 숨이 막혀 감에 분노한다. 3~4년 전 더 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이 있다. 한국은 지금 흙에 시멘트를 너무 쏟아붓고 있다고, 국토를 과잉 관리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서울 근처인 경기도나 이런 데 농사짓다보면 시멘트 분진 등에 섞여 깨끗한 흙을 보기 어려울 정도다. 좋은 먹을거리가 나올 수 없는 풍토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아파트를 증오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자본과 콘크리트 무게 때문에 서울을 떠나는 거다.

▲ 이종수 연세대 교수는 삶터, 집터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드닝에 관심을 둔 이들이 특히 콘크리트로 뒤덮인 국토를 걱정하는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 유구한 5000년 역사가 지닌 이 환경을 어쩜 이렇게까지 파괴시켰는가를 되돌아보면 비통할 뿐이다. 공간과 건축이 사람을 만드는 건데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화엄사 등 절터도 훼손됐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 다도해 풍경은 세계적인 거다. 사이먼&가펑클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스카버러 해변을 가 봐도 우리나라 풍경처럼 아름답지 않다. 그런데 이런 세계적인 풍경이 넘치는 곳의 경관 역시 콘크리트로 뒤덮이고 있다. 그건 마치 나 같은 돼지가 깔아뭉개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도시를 보자. 마치 아파트를 안 지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것처럼 시멘트로 뒤덮고 있다. 서울, 광주 할 것 없이 70%가 아파트다. 개중 순결한 영혼들이 자발적으로 도심에 아름다운 공동체주택을 짓고 삶터가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하지만, 결국 주변 환경에 치여 설자리를 잃고 마는 게 부지기수다.

공공건물은 아름답게 지어질 의무가 있는 거다. 예를 들어 서울시 청사 짓는데 2500~3000억 들었다. 스페인의 빌바오도 그 정도 들였다. 그런데 빌바오는 일 년 관광수입으로 공사비를 회수했다. 이에 비에 서울시 청사를 찾는 관광객이 얼마나 될까? 서울시 청사나 용산구청이나 성남시청이나 이런 데가 호화청사로 욕먹고 있다? 그 때문에 욕하는 대신 아름답게 짓지 않은 것을 탓해야 해다.

지난번 포럼에서 공동체가 이 시대 구원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짧게는 한 십여 년, 시대마다 그 시대를 치유하는 학문이 있다. 현 우리 사회는 소통과 관계가 무너지고, 불안과 피로가 쌓이고 전통은 와해된 지 오래다. 결속과 존중이 부족하고, 공공성과 윤리가 부족하다. 하루에 30명, 1년에 1만5000명이나 자살을 하는 나라, 이혼도 마찬가지로 높은 게 우리나라다. 이웃이 파괴되고, 눈을 흘겼다는 이유로 때려죽이는 등 갈등지수가 세계 최고에 달한다. 공동체가 깨진 한국사회가 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있다.

때문에 지금 시대는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앞으로 20여 년은 공동체 학문이 화두로 큰 줄기를 형성할 거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작은 공동체 단위인 마을만들기 등 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이들 모두가 이 시대의 안중근, 이순신이라고 생각한다.

강조하고 싶은 말은?

아름다운 마을을 함께 만들어갈 목수와 화가를 기다린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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