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애(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광복 70년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일본에 의해 경성부로 전락하고 해방과 함께 다시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나라의 수도 이름이 어떤 사연으로 바뀌어 왔을까.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광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 고종은 자주의 정신을 대내외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 위신을 다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며 즉위했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한 의전상의 국호로, 국명은 대한(大韓)이었다. 대한은 삼한(三韓)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 나라를 하나로 합쳐서 부른 것이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왕국이었던 조선과 달리 제국으로 국격이 높아진 대한제국은 한성의 공식 명칭을 ‘황제가 임하는 제국의 수도’라는 뜻에서 황성(皇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일제 식민 지배의 행정 중심지로서 경성부로 불리게 되고, 경기도 도청 소재지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일본은 왜 서울을 ‘게이조(京城)’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에서 교토(京都)가 누려온 전통적 수도로서 상징적 위상과 메이지 시대에 에도에서 도쿄(東京)로 지명을 바꾼 과정을 살펴보면, 일본인에게 ‘경(京)’이라는 말은 수도에 해당하는 특별한 지위의 도시를 일컫는 명칭이다. 수도를 뜻하는 ‘경’에 한반도의 전통적 읍성 특유의 성곽 도시 이미지가 결부된 명칭인 ‘성’을 결합해 ‘경성’이 지명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것이 1918년에 제정한 경성부 휘장이다. 한가운데 경(京)자를 중심으로 성곽을 형상화한 동그란 원이 둘러싸여 있다. 이후 1925년 개정 도안을 일반에 현상 공모한 결과 당선작으로 선정된 것은 성벽을 형상화한 동그라미의 좌우를 허문 모양이다. 경의 아래위로 한자 산(山) 모양이 되면서 북한산과 남산을 상징하고 동서로 시가지가 확대되어 가는 미래상을 표현한 셈이다. 실제로 1936년에 청량리, 마포, 영등포 일대를 포함하는 ‘대경성’ 계획으로 경성부의 면적이 3.5배로 확대되고 인구는 65만이 되어 도쿄, 오사카, 나고야, 고베, 요코하마, 교토에 이은 제국 7대 도시의 반열에 올랐다.

해방 후 1년 동안은 경성부로 불리다가 1946년 8월 15일에 ‘서울시’로 바뀌었다. 이날 전문 7장 58조로 된 ‘서울시 헌장’이 발표되었는데, 그 제1장 1조에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함’이라고 명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서울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 시대 기원설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이 셔ᄇᆞᆯ, 서벌 등으로 불리다가 서울로 변했다는 것이다. 신라 시대에 이미 지금의 경주를 서울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고려가 신라를 흡수하고 개성에 도읍을 정한 후에도 백성들은 그곳을 서울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에도 서울이라는 말은 한성부나 한양, 경조, 경도, 수선, 장안 같은 말보다 더 일반적으로 사용했다.

또 다른 일화로, 조선의 태조가 성을 쌓으려 할 때 큰 눈이 왔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비해 안쪽은 눈이 녹는 것을 보고 그 경계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한다. 눈(雪)으로 생긴 울타리의 울이라는 의미인 설울로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공식적인 문건에 서울이 표기된 것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 4월부터다. 국문판에는 서울로, 영문판에는 SEOUL로 각각 그 발행지가 표기되었다. 다른 신문들이 황성이라고 표기한 것과 구별된다. 외국인들도 지도를 제작하면서 한성부가 아닌 SEOUL로 표기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성부가 경성부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이라는 표현을 썼다. 잡지 ‘서울’이 발간되기도 하고, ‘서울에 딴스 홀을 허하라’는 글도 나왔다. 공식 명칭 ‘게이조(경성)’와 대중의 명칭 ‘서울’이 공존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서울의 이름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뀔 뻔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승만은 서울이라는 명칭이 특별한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외국 사람들이 서울이라는 발음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한성, 한양, 한도의 이름 중에 하나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서울시와 각 부가 협의하고 시민을 대상으로 투표해 본 결과 ‘우남’이라는 이승만의 호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일 많았다고 보고했다. 이승만은 당장 바꾸는 것에는 무리가 따르니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서 본인이 세상을 뜬 후 바꾸라고 지시했다. 하마터면 우남특별시민이 될 뻔했다.

1960년대만 해도 시청 앞에서 벼 수매를 할 정도로 시골 모습을 간직했던 서울은 1962년 총리 산하 특별시가 되고, 1963년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한 결과 면적이 거의 2배로 늘어나면서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일제가 이루지 못한 대경성은 메트로폴리스 서울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1946년 8월 15일 서울시 헌장 제정에 이어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한국인에게 서울은 오랜 시간 동안 진정한 수도의 의미로 각인되어 왔다. 고도 서울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과 남과 북으로 나뉜 민족이 서로 총을 겨누는 비극을 지닌 채 오늘에 이르렀다. 미래의 어느 8월 15일, 진정한 자주와 독립을 이룬 대한민국 서울의 모습을 꿈꾸어 본다.

참고문헌
김백영(2009)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 지성사.
임동근, 김종배(2015)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탄생’. 단비.
전우용(2008) ‘서울은 깊다’. 돌베개.
최종고 편(2011) ‘우남 이승만’. 청아.

서영애(객원 논설위원·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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