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영애 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지인으로부터 하얼빈 여행을 제안하는 문자를 받은 건 몇 년째 끌어오던 숙제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안중근 기념관 건립 1주년을 기해 하얼빈시에서 안중근을 그린 뮤지컬 ‘영웅’ 공연 팀을 초청한 것이 계기였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서 정북 방향에 위치한 하얼빈은 인천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곳이었다. 도착해서 흥미로웠던 건 중국 여행객의 짐에 거의 빠짐없이 전기밥솥이 있었다는 점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만난 한 조선족은 서울에서 사오는 전기밥솥이 현지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고 설명했다. 안중근을 그린 뮤지컬 ‘영웅’은 규모가 꽤 큰 공연장에서 열렸다. 뮤지컬의 불모지인 중국에서 열리는 첫 공연을 위해 땀 흘린 공연 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하얼빈 현지의 안중근에 대한 관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중근은 190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일정을 접하고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한다. 거사 후 체포되어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기 전까지 11일 동안 하얼빈에 머물렀다. 하얼빈은 러시아에 의해 철도가 건설되면서 생긴 근대 도시로, 당시의 국제 정세를 통해 탄생 배경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유럽의 중국 진출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5개 항구를 개방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891년 러시아 정부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톡을 직접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부설 계획을 승인함으로써 군사를 이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갖게 된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과 개발 계획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대륙 침략 의도가 드러나자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을 남만주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중국을 구원하는 데 기여했다. 그 댓가로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만주 진출에 중요한 이권을 획득하는데, 그것이 동청철도(The Chinese Eastern Railway) 부설권이다.

송화 강이 흐르는 중국 변방의 하얼빈이라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 도시가 건설된 것은 이 동청철도가 부설되면서부터다. 허허벌판에 철도 부설 사무실과 숙소가 세워진 후 불과 10여 년만에 철도 도시로 빠르게 성장했다. 동청철도의 전 노선이 개통되자 노동자, 건설업자, 상공업자들이 하얼빈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인들의 하얼빈 이주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 중국, 일본, 조선인이 활동하는 국제 도시 하얼빈은 동청철도를 관리하는 중심 지역으로서 러시아의 연해주와 일본의 남만철도, 안봉선을 연결하는 접경지대이자, 도시 간의 허브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하얼빈에서 뤼순까지 이어지는 동청철도의 노선은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여행을 했던 여정이다. 이효석은 일제 강점기에 ‘동양의 파리’라 불리던 혼성의 도시 하얼빈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을 소설에 담았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섞인 근대화된 도시, 자본주의의 첨단 도시이자 식민지의 어두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적인 도시로 하얼빈을 묘사했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라는 강한 인상이 그의 소설에 담겨있다.

짧은 시간 동안 체험한 하얼빈의 도시 경관에는 이효석이 느꼈던 예전의 영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러시아 유산과 중국 전통이 공존하며, 신축 건물의 입면 디자인과 장식도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점이 눈에 띄었다. 영하 30도 강추위의 송화 강변에서는 빙설제가 열려 수많은 관광객이 화려한 조명과 거대한 얼음 조각을 즐기고 있었다. 하얼빈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안중근 기념관은 작년에 하얼빈 역사에 다시 건립되었다. 소박한 기념관에는 비교적 세밀하게 안중근의 생애가 자료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전면 유리를 통해 하얼빈 역의 플랫폼이 보이도록 설계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서 있던 위치가 바닥 포장에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자서전을 완성한 후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 평화를 위한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선 의병 장교였을 뿐 아니라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학자였다. 안중근의 재판을 지켜본 한 영국 기자는 공판 참관기에 “형을 선고 받은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라고 그의 마지막 모습을 묘사했다. 안중근은 유언으로 자신의 유구를 하얼빈 공원에 두었다가 해방이 되면 조국으로 옮겨 달라고 했으나 현재까지 그 행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꿈에 그리던 조국은 고사하고 그가 마지막에 잠시 머물렀던 하얼빈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하얼빈 공원은 1900년에 조성된 하얼빈 최초의 공원으로, 현재는 조린 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마다 겨울 축제인 빙등제가 열리고 있다.

안중근이 그리던 평화는 아직도 요원하지만 만주는 오늘날 큰 변화의 물결 속에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인들의 여행과 투자, 조선족의 한국 방문과 취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두만강 개발, 시베리아 철도와 한반도 종단 철도를 통한 만주의 연결, 북한-중국 국경지대의 경제 특구 등이 구상되고 있다. 서울의 대표 경관에 관한 논문을 쓰며 한 장소에서 일어난 변화들은 수많은 층위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궤적은 단순히 과거에 남아서 박제되지 않고 시공간적 네트워크를 통해 현재와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지를 과거에서 배워야 하는 이유다. 숙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온몸에 핫팩을 붙이고도 뼛속까지 추운 곳에 가서야 깨달았다. 조국의 오래된 수도 서울이 하얼빈 동포들에게 전기밥솥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인용문헌
원재훈(2010)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파주 : 사계절
이기웅 옮겨 엮음(2000) ‘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뤼순 감옥까지의 안중근 투쟁기록’, 파주 : 열화당
이은상 역(1979) ‘안중근의사 자서전’, 서울 :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효석(2007)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단편선’, 서울 : 문학과 지성사
한석정, 노기식(2008)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서울 : 소명출판

서영애(객원 논설위원·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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