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병(아썸 대표·생태학박사)

염치(廉恥)는 국어사전에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염치가 없으면 몰염치(沒廉恥)라 하고 염치를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염치없는 짓을 하면 파렴치(破廉恥)라고 한다. 염치는 다른 동물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야생 세계에서 거친 생존방식에 적응해온 유전자를 가진 생태계의 동물들은 염치를 차릴 틈이 없다. 개체의 생존과 유전자의 번식에 올인한 놈들 중에서 자연조건의 선택을 운 좋게 누린 놈들이 현재 생존하는 모든 종이기 때문이다. 먹이를 두고 남들에게 양보했거나, 부끄러워서 생식기회를 놓친 종들의 유전자는 결코 지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치는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이 된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염치를 모르거나 염치를 깨뜨리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느 재벌가의 큰 따님은 기내에서 땅콩을 까서 주지 않았다고, 승무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퍼붓고 수백 명이 타고 있는 비행기를 돌려세웠다가 재판을 받고 있다. 사건이 커지자 파렴치하게도 증거 조작을 치밀하게 시도하다가 그마저 들통이 났다. 그러자 그의 여동생은 몰염치하게도 “원수를 갚겠다”고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어느 부잣집 사모님은 쇼핑센터 주차요원에게 무릎을 꿇리고 폭언을 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하루에 700만 원어치의 쇼핑을 할 수 있는 VIP손님인데 하루에 7만 원짜리 알바생 정도는 도저히 자신과 똑같은 인간대접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 전엔 어느 중견기업 회장님께서 호텔 입구 주차요원이 제때에 자기 차를 안내하지 않았다고 폭행을 휘둘렀다가 신문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 흔하게 일상화된 갑을관계에서의 부당한 ‘갑질’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부끄러움이 든다.

만약 어느 원숭이가 양손에 바나나 다발을 들고 입에도 하나 물고 있으면서 다른 배고픈 원숭이의 바나나 한 개를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 염치없는 욕심쟁이 원숭이에게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는 수 조원대의 재산을 가진 재벌들이 자신의 재산을 더욱 늘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염치없는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대한 자본의 힘을 앞세워 노동자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수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며 오로지 극대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혹시 후천성염치결핍증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부와 권력의 무한증식의 끝은 어디일까? 자신이 모아들여 축적한 재산을 죽을 때까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끊임없이 염치없는 탐욕을 부리는 종은 인간밖에는 없다. 다람쥐가 겨울을 대비해 도토리를 모아 땅속에 숨겨두는 양은 자신이 한겨울 넘길 양을 결코 넘지 않으며, 간혹 건망증 때문에 잊어버린 땅속의 도토리는 놀랍게도 이듬해 새로운 도토리나무의 탄생에 도움을 준다. 무리생활을 하는 대형 포식동물이나 영장류들의 사회에서, 우두머리는 먹이 섭식의 우선권을 갖지만 그 순간의 식욕을 채우고 나면 나머지는 미련 없이 무리에게 넘겨준다. 다음 달 먹을거리나 이듬해 식량을 위해 먹이를 따로 비축하지 않는다. 자신이 돌보는 어린 새끼들 정도의 섭식을 본능적으로 도울 뿐 이미 장성한 2세들은 결코 돌봐주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다. 냉장고가 없는 그들에게는 먹이를 쌓아둬 봐야 자연에 의해 모두 부패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음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매번 신선한 새로운 먹이사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생태계에서 섭식의 질서인 것이다. 상위 포식자의 개체수가 늘어나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어지면, 불운하거나 힘의 우위에 밀린 약한 개체들부터 아사함으로써 자연은 적절한 개체수 조절을 한다. 생명의 역사 그 도도한 흐름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인간이 다른 동물과 생태적으로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인 염치의 DNA가 생긴 이유는 뭘까? 오랜 수렵생활기(생태인류학적으로 99%의 기간)에서 얻어진 DNA일 것이다. 10~20명 정도로 이루어진 무리생활에서 서로 협력하여 대형동물을 사냥하면서 살아왔던 그 오랜 시기에 생존을 위해 갖게 된 지혜가 바로 염치인 것이다. 무리의 우두머리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사냥을 한 후 노획물을 적절히 나누어 먹어야 무리 전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았던 여자들이나 아이들에게도 적당량의 음식을 나누어야만 무리가 멸종하지 않고 대를 이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무리 중에 탐욕스러운 자가 사냥한 먹이를 독차지했다면 그는 추방되거나 과식으로 병들어 죽었을 것이고 그 집단은 와해되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그들에게 적절한 분배를 하도록 그들의 유전자에 염치를 남겨준 것이다.

그러나 1만 년 전 쯤에 시작된 농경사회의 발전은 빠른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인류문명을 이루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고 이는 부족이나 국가의 국토개념이 되었다. 자연스러웠던 다처다부제는 토지와 재산의 상속개념에 눈뜨면서 결국 다소 부자연스러운 일처일부제의 결혼제도를 낳게 되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500만 년 이상 동안 20년 내외에 머물다가 농경사회로 접어들며 점차 늘어나서 로마시대쯤 되었을 때 30년이 되었다. 단순한 식량의 비축 수준을 넘어서 부와 재산의 내용은 다양해 졌고, 이에 대한 인간의 탐욕도 늘어났다. 토지와 재산의 상속개념은 가문과 혈통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배타적 순혈주의와 가부장적 국가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역사시대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간은 인간관계의 기본에 염치를 상실하지 않았다.
인구증가는 부양 가능한 식량생산에 의해 통제되었다. 모두가 넉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없는 자연조건이 되면, 인심은 각박해지고 결국에는 전쟁을 통해 대량 살육을 함으로써 개체수 조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동양사상에서 공자의 ‘인(仁)’과 ‘도(道)’사상도 인성의 본질 중의 하나인 염치에 뿌리를 둔 사회윤리인 것이다. 전쟁과 살육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도 어쩔 수 없는 생태적 선택이지만, 평상시에 일상의 사회를 유지하는 공동선은 궁극적으로 염치에 수렴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 진보적 사상가였던 묵자(墨子)의 ‘겸(兼)’사상도 염치에 근거한 평등박애의 사상이었다. 상앙(商鞅)의 ‘법(法)’도 인간의 몰염치한 이기심을 공평한 ‘법치(法治)’를 통해 통제하겠다는 사상이다. 장자(莊子)와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사상은 인간의 염치에 근거한 자연주의 생태사상에 까지 이르고 있다.

통치권자가 국민을 상대로 한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염치가 없는 행동이다. 최고경영자가 구성원 모두의 행복보다 자신의 부를 늘리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도 염치없는 행동이다. 다수의 힘없는 국민이나 노동자들은 염치없는 의사결정을 할 여지가 별로 주어져 있지 않다. 계급의 위로 올라 갈수록 그들의 의사결정과 행동은 많은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아침에 눈만 뜨면 쏟아져 나오는 염치없는 사람들의 뉴스의 홍수 속에 부와 권력이 클수록 비열함의 정도가 심해지는 세상을 바라보며, 생태학자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후천성염치결핍증(ASDS)’이었다. 원래 대부분의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염치가 없었던 것은 아닐진대, 가진 자들이 보이는 이러한 행태는 아마도 부가 세습되면서 후천적으로 얻게 된 병증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잠시 살다 죽으면 한낱 우주의 먼지로 돌아갈 부질없는 한 생명체가 인간인데, 지구라는 행성의 껍질인 지각의 일부를 자기 소유라고 국경선을 긋고,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 왜 더불어 나누면 더 많은 동종인 인간들이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음에도, 자신은 물론 자신의 수백 대 이후 자손들까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부를 소유하고서도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탐욕을 부릴까? 후천성염치결핍증(ASDS)은 부와 권력을 많이 소유한 집단의 가족 내에서 AIDS보다 더 치명적으로 빠르게 전염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이 든다. AIDS는 점차 치유 가능한 질병으로 전망되고 있지만, 타자(他者)를 물화(物化)하는 우리사회 상류층의 치명적 정신병증인 ‘후천성염치결핍증’은 더욱 빠르게 전염되어 퍼지면서 비열한 세상을 만들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권오병 집필위원(아썸 대표·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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