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애란(청주대 교수·조경기술사)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이자 수학자인 히로니카 헤이스케는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배움은 일단 지나면 잊어버리지만 필요에 의해 다시 한번 꺼내려 할 때 전혀 배워 본적도 없고 들어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는 배움을 통해 위와 같은 측면 즉 ‘지혜의 넓이’가 있다. 더 나아가 지혜에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는 ‘깊이’ 그리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이라는 측면도 있다. 또 하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결코 학자나 예술가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단히 쌓아올려야 하는 것이라 한다. 50여년 남짓한 인생을 수학의 한 정의를 파헤치기 위해 학문에 뛰어들고 일생을 바친 수학자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이다.

‘반성’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심리 상태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반성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반성문’이란 ‘자신의 언행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을 돌이켜 보며 쓴 글’이라고 적고 있다. ‘연탄길’ 등 가장 따뜻한 이야기를 쓰기로 유명한 이철환의 ‘반성문’을 통해 그는 영혼을 살찌우는 일보다 경제적 부를 축적하는 일에 집중된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진실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반성’을 이야기한다. “때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거짓말도 생존을 위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때로는 반짝이고 싶어 내 몸에 불을 켰다. 내가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았던 적도 있다” 각자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지만 차마 밝히지 못했던 진실어린 고백을 해본다. 반성의 대상 또한 넓다. 나무와 풀과 꽃, 곤충과 같은 자연에서부터 가족과 이웃, 과거, 자신의 습성 까지. 저자는 “글과 사람이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삶의 무게보다, 나이의 무게보다, 내가 쓴 글의 무게가 내겐 훨씬 더 무거웠다”고 고백한다.

서울대 건축학과 김광현 교수는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자화상이자 반성문을 펴냈다. 40여년을 동행한 건축이지만 함께한 건축가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며, 분파되고 이기적인 한국 건축계를 꼬집는다. 그러나 비판에서 논의의 범위를 확대하여 건축의 현상, 생산 자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건축의 태도와 역할을 다시금 고민하도록 써내려가고 있다. 일곱 장으로 이어진 이 책에서 우선 건축의 근본적 의미를 되짚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느닷없이 나타난 모더니즘의 회오리를 겪으며 본질을 흐린 ‘유행’과 ‘이미지’의 등장으로 이어진 허상을 논한다. 특히 ‘건축의 공공성은 사회를 위한 것’에서는 산업과 제도, 정책의 중요성을 통해 사회의 기본 시스템을 논한다. 즉 인간과 사회에 내재한 공통의 건축적 감각을 말하고 근본적 의미를 되짚었다.

우리 조경계 또한 2013년 10월 한국조경학회를 중심으로 ‘한국조경헌장’을 선포하였다. 자연과 사회, 문화를 엮는 조경의 가치를 필두로 하여 조경의 영역과 대상 그리고 과제를 제시하였다. 조경의 영역을 정책에서 연구, 교육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조경인 중 다양한 계층과 소속인들이 직접 함께 낭독하였다. 조경전문가로서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실천을 통한 지속가능성의 구현을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올 한해 우리의 행보는 어떠했을까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대형 프로젝트와 국가 및 지자체의 정책적 공약에 순응하여 전문가로서 지켜야할 근본적 의미와 가치, 프로세스를 놓치거나 생략하진 않았는지. 효율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아직도 나타나는 아이디얼한 현상들의 잔치에 목말라하는 그들에게 목을 축여주었는지. 나 자신 또한 그들의 지식수준에 맞추느라 전문가로서의 지혜를 감추거나 내려놓았을 것이다. 올해가 아닌 5년 10년 이상을 내다보아야 할 사회적 사업을 지자체의 목표 기한 혹은 가시적 성과를 위해 장소를 희생하고 과정에 대한 할애를 축소하였을 것이다. 사회의 흐름과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읽을 절대적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년을 기약하였을 것이다. 천천히 해석하고 느리게 시작하며 다양한 사회구성원과 함께 나누며 가꾸어야 했던 일들을 하지 못했다. 무엇이 더 소중한 의미인지를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발맞춘 적도 있다. 이렇게 나온 결과물들은 쉽게 무너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헤이스케가 말한 ‘부단히 쌓아올린 지혜’가 되지 못하고 현재의 가시적 전유물이 될 가능성을 반성한다.

‘논어’은 시작이 배움이며 도덕적 인간형으로 끝을 맺는다. 모든 학문과 사회조직은 결국 배움과 지혜로운 인간사회의 실천에 있음을 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자세히 보면 이 배움과 사회 사이에 친구의 소중함과 사회의 불협화음, 그리고 서로 간에 알아주지 않음에 대한 노여움 등 인간관계 속 희로애락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과정의 고뇌와 고민, 논의들을 최소화하고 파편화된 지식과 가시적 사회의 연역적 산출에 빠른 속도로 정책과 사업들을 마감하고 있다.

올해 일년 한세기에 나타나기 힘들 정도의 대형의 사건과 사고가 자연재해와 인재를 넘나들며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이는 사회적 구조가 새로운 혹은 기괴한 형태로 나타나며, 도시구조가 갈수록 입체화되고 이동량과 수단이 많아짐과 동시에 초고속화되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에 의한 천재지변이 예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크고 작게 일어나고 있다. 조경인들이 예측하고 계획하고 실행해야 할 사업들이 도처에 다양한 영역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소방방재처럼 대응하기도 바쁘다.

반세기 조경의 역사와 함께 낭독한 ‘한국조경헌장’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일, 조경의 대상과 과제 중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그룹화하여 창조적 지혜를 모으고 나눠야 할 것이다. 또한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처음 가졌던 조경인으로서의 ‘진실된 지혜’를 위하여 나 자신부터 반성하고 내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반성하는 12월이 되었으면 한다.

이애란(객원 논설위원·청주대 교수·조경기술사)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