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세헌(가천대 교수/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회장)

바람은 기압의 고저와 온도의 차이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흐름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 바람은 단순한 공기이동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은 계절과 방향 뿐 아니라 세기, 장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실바람, 산들바람, 남실바람, 간들바람은 살랑살랑 부는 미풍을 뜻합니다. 바람이 좀 더 세지면 소소리바람과 흔들바람, 건들바람이 됩니다. 그리고 겨울의 삭풍이나 강풍은 칼바람, 고추바람이라 불렸습니다. 이른 봄엔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불고, 보리 누름철에는 흙가루가 날리는 흙바람이 붑니다. 틈새로 부는 바람은 틈바람이라 하는데 틈바람 가운데 이른 봄에 차갑게 부는 틈바람을 살바람, 좁은 틈으로 거세게 부는 바람을 황소바람이라고 합니다.

그 뿐인가요. 산에서 부는 산바람, 골짜기에서 부는 골바람, 들에 부는 들바람, 대나무 잎을 서걱거리게 하는 댓바람, 솔잎을 흔드는 솔바람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갯바람은 짭조름한 갯냄새를 몰고 오고, 꽃이 피는 봄철엔 꽃향기를 실은 꽃바람이 붑니다. 또한 비나 눈을 몰아오는 흘레바람이 있습니다. 날이 가물어 물기를 머금지 않은 바람을 ‘마른 바람’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세차게 부는 마른바람은 ‘강바람’이라 합니다. 가문 땅에서 강바람이 불면 먼지를 일으키는 ‘먼지바람’이나 흙가루를 날리는 ‘흙바람’이 되겠지요. ‘흘레바람’은 비나 눈을 몰아오는 바람입니다. 이런 ‘비바람’이나 ‘눈바람’이 세차게 불면 우산을 써도 별로 소용이 없겠지요. 하지만 눈을 날리며 바람씨도 잔잔한 ‘눈꽃바람’은 그런대로 쐴 만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 직접 일으키는 바람들도 있습니다. 손을 흔들어서 ‘손바람’을 내기도 하고, 코로 ‘콧바람’을 내보내기도 하며, 입으로 ‘입바람’을 불기도 합니다. 입술을 좁게 오므려서 ‘휘파람’을 불기도 하는데, 길게 불면 ‘긴파람’이 되지요. 옷깃을 풀럭풀럭 날리면 ‘깃기바람’이 일고, 새가 날개를 퍼덕이거나 헬리콥터가 날개를 돌리면 ‘날개바람’이 생깁니다. 참고로 새의 날개를 ‘바람칼’이라고도 합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듯하다는 뜻이지요. 배를 타면서 쐬는 바람은 ‘뱃바람’이라 하고, 가마를 타고 가면서 쐬는 바람은 ‘가맛바람’이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자전거바람’이나 ‘오토바이바람’ 같은 말이 사전에 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바람의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바람을 가까이 관찰하며 바람과 더불어, 바람에 친숙하게 몸을 맡기며 살아왔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이 많은 바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분명 바람은 지금도 불어오지만 바람을 표현하는 우리말들은 거의 사라지고 우리는 태풍, 토네이도, 허리케인, 블리자드 같은 자극적인 외국 단어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밖을 내다보며 황사바람이 부는지 마스크를 준비해야 하는지 걱정합니다. 물론 농사 짓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산업이 다각화 되면서 날씨에 덜 민감하게 되고, 지구온난화니 이상 기온이니 해서 기후의 변화가 심해진 탓도 있겠지만, 실바람의 결처럼 섬세하고 고운 우리말이 사라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을 이야기 하면 몇 년 전에 깊은 인상으로 남은 건축물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주도 핀크스 미술관 시리즈 중 하나인 ′풍′미술관입니다. 작고하신 이타미 준이 설계한 ′풍′미술관은 제주의 바람을 담기 위해 활처럼 휘게 한 오두막 형상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벽면의 나무판 사이에 틈을 내서 바람이 통과하도록 했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그곳에 서 있으면 건물 전체가 바람이 연주하는 악기가 됩니다. 바람의 움직임, 소리 그리고 빛과 그림자와 같은 자연을 전시품으로 삼은 것은 자연을 다양하게 변주하여 다시 자연을 드러내는 은유의 미학의 진수인 것 같습니다.

바람은 조경에서도 중요한 디자인 요소입니다. 바람은 찰나의 경관을 느낄 수 있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바람은 숲이나 정원에서 소리를 전달하고 식물의 미묘한 움직임을 만듭니다. 우리는 바람에 의한 꽃의 떨림으로 바람을 느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가을 햇살에 반짝이며 넘실거리는 순천만 갈대의 아름다움도 바람이 연출하는 자연의 대서사시입니다. 바람이 만드는 조류가 모래를 해안으로 실어 나르고, 겨울철 강한 북서풍이 모래를 퍼나르며 거대한 모래언덕을 만들 듯이 바람은 땅에 오랜 역사를 새기기도 합니다. 또한 도시를 만드는데 있어서 낮에 데워진 오염된 공기를 외부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가 저녁에 도시 외곽지역으로 밀어내고 있는 역할을 하는 바람길 조성은 국내에서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요한 사업입니다.

두서없었던 바람이야기 끝내면서 저는 이제 가을이 저만치 도망가기 전에 살랑살랑 부는 들바람과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만나려 가을 억새가 아름다운 난지도 하늘공원으로 향하려고 합니다. 조경인 여러분! 불황의 칼바람처럼 조경업계가 어렵지만 계절이 변하면 꽃바람이 불어와 휘파람 불 날이 꼭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바람은 그냥 다 지나가는 바람일뿐….

안세헌(객원 논설위원·가천대 교수·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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