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매 화가의 ‘햇살은 가득하고...', 크기 : 60.6 x 45.5cm, 재료 : Acrylic on Arches rough canvas, 제작년도 : 2013


하얀 벽을 응시하다
박춘매 화가의 그림 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그림이다. 그림을 대하면 가장 먼저 흰 벽이 눈에 들어오고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치 바닷가에 서서 무한이 오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듯 머리가 비어지고, 숲속에서 바람에 몸을 맡긴 듯 마음이 잠잠해진다. 침묵을 요구하는 그림이다.

지붕 선은 직선이나 리듬감 있게 꺾여 너무 엄격하지 않게 집을, 우리를, 세상을 하늘로부터 구분 지어준다. 작은 창을 단 벽은 소박하나 넓은 품을 지녔다. 무채색인 흰색은 과묵하나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중심에서 비켜난 창문은 나를 향해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무심히 내 어깨 뒤의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무안하지 않게 집의 벽을 빤히 쳐다볼 수 있다. 구도(求道)적이다. 그러나 주변의 작은 사물들은 저 집이 세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얀 벽의 이유
건축가 문정석의 도움을 받아 왜 저 집이 구도적으로 보이게 된 이유를 유물론적으로 따져보았다.

저 집의 벽은 시멘트 블록을 쌓아 만든 것이고 표면은 몰탈로 마감되었다. 시멘트 블록은 인장력이 약해 창을 크게 내려면 인방을 창 윗부분에 보강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지 창을 작게 내었다. 작은 창은 외풍을 막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니 꼭 사정이 나빠서만은 아닐 수 있다. 어찌되었건 그러다보니 창은 작아졌고 벽은 넓어졌다. 벽의 품이 넓은 이유다.

벽돌이나 다른 외장재로 집을 지으면 줄눈으로 벽의 넓은 면이 분할되고 텍스쳐가 강조되었을 텐데 이 벽은 몰탈로 외장을 처리하나보니 넓은 면으로 남을 수 있었고 미끈해졌다. 지붕은 슬레이트다보니 두께감이 없어 무겁지 않다. 집짓기의 편의성을 위해서 선택했을 박공지붕도 단순함을 더하는데 큰 몫을 한다. 벽이 강조된 이유다.

시멘트 몰탈은 표피가 얇아 여러 계절을 겪으면서 너덜너덜하게 갈라졌을 것이고 주인은 이를 가리기 위해 하얀색으로 벽을 칠했을 것이다. 넓은 벽이 경쾌하면서도 과묵한 이유다.

왜 저 집이 구도적인 인상을 줄까 따지다보니 추리력이 발동해서 다른 것도 읽게 된다. 문정석은 창 옆으로 보일러 연기 빼는 관이 튀어나온 것과 창 아래 플라스틱 대야가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왼쪽의 작은 건물은 화장실 일 것이고, 본체의 벽 안쪽으로는 보일러실과 물 쓰는 시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보통 저런 집에는 물 쓰는 공간이 한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추론을 해보면 겨울에는 각목 틀로 만든 창에 비닐을 못으로 고정시킬 수 것이고 저 오른쪽에 심겨진 고추 모종은 집 주인이 살뜰히 살림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 예술 하는 우리
타당하건 그렇지 않건 저 그림 속 집이 나름의 매력을 갖게 된 연유를 밝히는 데는 여러 추론이 필요했지만 저 집이 지어졌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는 데는 별 추론이 필요하지 않다. 직설적으로 삶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집의 구조는 간단하고 저 집에 쓰인 제품은 모두 값싼 자재다. 시멘트 벽돌, 슬레이트, 각목, 빨간 고무 대야. 시멘트 벽돌은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건축자재고 슬레이트는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고기 구워 먹을 때는 불판이 되었다가 가림막으로도 쓰였던 제품이다. 물론 지금은 발암물질인 석면이 들어있어 멀리되고 있지만 말이다. 또 저 고무 대야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상상할 수도 없는 무수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제품이니. 김장할 때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화분으로도 물통으로도 혹은 아이들의 작은 풀장으로도 쓰인다.

값싼 재료들의 조합, 그러나 그것들이 이루는 집은 값 싸 보이지 않는다. 또 요소 하나하나는 그야말로 촌스럽지만 그림 속 저 집은 그렇지 않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새롭게 배열되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 셈이다. 내 한 친구는 도시 곳곳에서 무언가를 담아놓는 통으로, 화분으로 발견되는 빨간 고무 대야에 알레르기가 있다. 사람들의 무취향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 자체로 시각적 테러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이 보여서 씁쓸하단다. 사람마다 취향도 판단도 다른 것이니. 그러나 화가의 그림에서 빨간 고무 대야는 오른쪽의 초록색 고추 모종과 대칭을 이루며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색의 조합을 깨는 소품의 역할을 멋지게 한다. 친구도 인정하겠지?

화가의 말에 따르면 원래 집의 모습은 저 모습이 아니란다. 하얀 벽은 저렇게 하얗지만은 않고 얼룩이 있단다. 또 벽의 텍스쳐도 저렇게 매끈하지만은 않고 금이 가 있었단다. 아래의 빨간 고무 대야도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고 담에는 화분이 올려져 있어 그림처럼 하얀 벽이 넉넉하지 않단다.

화가의 힘이다. 담백한 시선으로 왜곡 없이 잡아낸 장면과 표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재료들로 지어진 집이나 화가의 손을 거치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저 재료들도, 저 집도, 저 그림을 보는, 우리도 품격을 갖게 되었다. 만약 화가가 여과 없이 사실대로만 집을 그렸다면 현실 인식에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앞서 언급한 정신적인 감상의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화가가 낭만적으로 집을 변형해 엽서 그림 같이 팬시하게 집을 그렸다고 해도 구도적인 면은 없었을 것이다. 또 사실성이 떨어져 작은 침묵 뒤에 오는 현실에 대한 반추도 약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저 집이 있었기에 화가의 작업도 가능했던 것이니. 저 집을 저렇게 짓고 살아온 누군가도 한 예술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저 그림 앞에서 침묵하며 그림과 함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도 예술 활동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한 예술 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로 가기. 이렇게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의 시선을 매개로 삶과 예술이 만났다.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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