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매 화가의 '서촌 오거리철물점', 사이즈:46 x 46cm 재료:watercolor & acrylic on Arches rough canvas 제작년도:2013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최근 어느 수다 떠는 자리에서 들은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라는 관용구가 귀를 솔깃하게 했다. 듀스가 1996년 낸 앨범 ‘DEUX Forever’에 수록된 ‘우리는’ 이라는 노래의 첫 소절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지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사사로이 대답할 수 없는 묵직한 질문,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닌 질문을 원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그 말이 던져진 순간 모두 푸하하 웃었지만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최근 새로운 사회적 방언으로 등장한 “썸 탄다”라는 말이 연애 단계를 섬세하고 나누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는 어떤 사회적 욕구가 반영된 것일까?

존재에 대한 질문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과거와, 땅과 단절된 삶을 요구하는 지금의 상황은 더욱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묻게 만든다. 풍경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도시는 장소의 정체성, 즉 장소성을 묻게 만든다. 박춘매 화가가 그린 3층 건물한테도 물어보자. “너는 누구? 거기는 어디?” 간판이 아니더라도 밖으로 나온 물건들이 자신은 건축 자재를 파는 곳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간판은 건물이 오거리나 그 주변에 서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건축물의 형태에서는 최근에 새롭게 조성되거나 단장한 동네는 아니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부족하다. 도대체 넌 어디에 있는 거야?

누하동 오거리

이러저러한 추측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저 건물의 정체성, 저 건물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 화가가 올 봄 저 그림을 인사동의 어느 화랑에서 전시했을 때, 그림을 보자마자 딱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저 건물이 있는 동네에 사는 지역 주민, 저 근처를 자주 다니는 분들이었다. “아! 누하동 오거리” 비록 지금 저 건물은 사라졌지만 누하동의 랜드마크였기 때문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 건물뿐 아니라 이 거리 자체가 이 근방의 시각적, 인식적 랜드마크이다.

오거리는 서촌, 더 정확히는 누하동에 있다. 서촌은 경복궁 서측에서부터 인왕산 기슭에 이르는 지역을 일컫고 효자동, 사직동,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이 포함된다. ‘오거리’라는 이름은 누상동과 누하동이 나누어지지 않고 누각동으로 불렸던 조선시대 누각동의 작은 동네중 하나인 오거리(五巨里)에서 유래한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도성대지도를 보면 인왕산 아래 옥류동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내려오던 골목길이 이 오거리에서 모인다. 지금도 누하동, 체부동, 통인동, 필운동이 오거리에서 만난다.

다섯 개의 길이 만나 형성된 이 오거리는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고 그러면서 사건도 일어나게 하는 부싯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초에는 서양화가 구본웅과 그의 친구 시인 이상이, 전쟁 후에는 이봉상, 천경자, 한묵, 시인 노천명이 오거리 주변에 살았다고 하니 이분들이 오고가며 일으켰을 문화적 스파클이 궁금하다. 천경자 화가의 글에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보자.

“누하동 골짜기 한옥에서 3년을 살았다. 그곳에서 4.19와 5.16을 겪었으니 아마도 1959년에서 62년 사이의 이야기가 되나보다. 집에서 골목길을 타고 오거리에 나서면 몇 번인가 우연히 시인 노천명씨와 부딪치게 돼 인사를 나누었고 화가 이봉상씨와도 자주 만나졌다. 고인이 된 이봉상씨와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 직장 역시 같은 학교여서 오래도록 친하게 지냈다.(중략) 한묵씨의 직장 역시 같은 학교여서 세 사람은 남매지간처럼 서로 허물없게 대했다. 한묵씨는 독신이라 출근길 아침 밥상을 이봉상씨 댁에서 받을 때가 많았고 더러는 우리집에서 싼 광어조림에다 아침을 먹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삼촌 대하듯 따랐었다.”
천경자, “만년청년 한묵씨” (경향신문 1979년 10월 3일 기사)

자하문로에서 들어오는 길이 넓혀지고 서쪽의 넓은 필운대로로 ‘집과 집 사이를 뚫고 흐르는 다섯 개의 골목길이 만나는 오거리’가 갖는 정체성은 오늘날 희미해졌다. 그러나 예전에 어떤 곳이었는지가 글로, 사람들의 말로 전해지고 주변의 간판으로 남아있어 다행이고, 작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최하는 ‘나의 사랑문화유산’ 캠페인에서 ‘서울미래유산상’을 받는 등 의미에 대한 해석이 거듭 거듭 이루어지고 있어 더욱더 다행이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이니.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도록 하자

누하동을 포함해 서촌지역은 ‘인왕산 아래, 경북궁과 청와대와 인접’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배경 삼아, 시간의 궤적을 따라 자신의 장소성을 천천히 형성해왔다. 앞의 오거리처럼 효율과 속도라는 명분 속에서 다소 훼손되긴 했지만 서울에서 고유한 색을 갖는 몇 안 되는 동네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동네의 매력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개발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훼손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누하동 오거리를 가기 위해 지하철 경북궁역 2번 출구에서 나와 큰 길을 따라 걷다보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를 발견하게 된다. 입구에 걸린 조형물이 명료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굳이 상징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입구에서 엿보이는 풍경으로 그 길이 시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길을 향해 난 차양, 길에 놓인 좌판들의 행진, 길 안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동선, 저 안에서 들리는 웅성웅성한 사람들의 소리와 냄새.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은 음식점이며 유리문으로 보이는 식당 내부의 북적거림으로 시장의 풍경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음식점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사람들의 밀도도 낮아진다. 장소는 기승전결을 갖고 자신을 알리고 방문객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장소성을 파악한다. 오히려 입구의 간판이 장소의 내러티브적 체험을 방해한 셈이다.

근대적 기획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의 도시는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격자로 짜인 가로와 비슷비슷한 건물들. 그야 말로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이다. 장소성이 없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 앞에 크게 간판을 내 걸지만 그 행위 자체가 클리셰가 된다. 그런데 이 방식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시장으로, 동네로 전염되었다. 몸으로 전달되는 정체성을 의심해 언어로 규정하고 시각화하려한다. 어느 순간 전국의 재래시장이 비슷비슷한 디자인언어에 포획된 이유이다.
더 이상 누하동이, 서촌이 그리고 우리네 동네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장소성을 언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체험으로 느끼는 일이 먼저이겠다.

참고 자료:
김한울(2014) “시간의 골목, 시간의 교차로”, 매거진 내셔널트러스트 30.
천경자, “만년청년 한묵씨” (경향신문 1979년 10월 3일 기사).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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