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애란(청주대 교수·조경기술사)
최근 들어 더욱 빈번히 발생하는 대규모의 엄청난 사건들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식이하의 사건들을 접하고 있는 우리들. 풍요롭다 못해 남아도는 물질 속에 둘러싸인 인간성 몰락의 허무한 마음. 합리성만으로는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에 나약한 인간의 마음. 세계가 발전하고 체계가 변해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 것이 동물성과 지성의 치열한 공존이 내면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사회를 돌아보면 도덕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 판단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 메말라가고 있는 인류 사회의 일대 불행이다. 최근에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을 교화하고 인간사회의 신뢰와 가치판단의 실천을 회복하자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몇 년 전 이외수씨가 펴낸 ‘글쓰기의 공중부양’이란 책에 ‘발상의 전환’이란 한 편의 에세이가 있다. 그는 우리 주위의 물질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지천에 널려있어 그 고마움을 모르는 것으로 물, 공기, 햇빛 등 자연을 둘째, 조금만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인 주식인 쌀과 부식의 여러 먹을거리들 그러나 정부의 보조에도 불구하고 쪽박을 차고 다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조금만 있거나 없어도 되는 것들로 명품, 보석들을 예로 들었다. 인류역사상 명품이나 보석이 없다고 멸종되거나 때죽음을 당한 사례가 없다. 또한 잠깐 사용하고 아주 오래 보관해놓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어떠한 경우는 인간보다 가치 있고 귀하게 여겨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슬프다한다. 옛날 선인들의 ‘오도송(悟道頌)’이란 문의 한 형태가 있는데 ‘진리를 깨달으며 성덕을 기리는 시의 한 형태’가 있다. 그 소재를 보면 주로 산과 물, 숲 등 자연을 이야기한다. 지천에 널려있고 작금의 사람들이 가장 하챦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눈물겨워하고 감사한다. 우리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가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2010년 우리에게 마이클 센델 Michael J. Sandel 의 ‘JUSTICE' 가 파란을 일으켰던 것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고민과 논의에 대한 소홀함의 반증이었다. 단기간 압축성장으로 이루어낸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는 경제적 성장과 효용성의 빛에 가려 인류 공동체의 미덕과 선, 도덕은 그늘로 가려져 죽어가고 있다. 문제해결방식의 합리적 과학과 논리체계는 문제 자체만을 보고 그 문제가 발생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과 공공의 목적 그리고 초기의 약속을 묻어버렸다.

또한 개인주의와 공리주의라는 양극단적 이즘의 시대를 겪었다. 나 이외의 사람에게 직접 피해가 없는 한도 내에서의 개인의 행복이라는 개인주의적 쾌락과 다수결이란 통계가 공공행복의 수치적 비율을 높일 수 있다는 수학적 체계의 공리주의가 팽팽한 대칭저울에 공존하고 있다. 서로 대항하고 대응하며 여기에 이분법적인 사고까지 적용시켜 선택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도록 만들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는 한층 더 어렵고 혼란스러워지면서 그리고 진정한 진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상호간의 의심에서 비롯된 진실왜곡상의 피해의식이 우리 모두의 내면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는 것인지. 이러한 사회에 센델은 개인주의의 쾌락과 공리주의의 다수결이 ‘선(善)’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류의 선과 덕은 이성을 가지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주체를 개인으로 보지 말로 인간 공동체의 신뢰와 선을 통해 도덕에서의 예와 존중에 대한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국에서 20여 년 간 과학철학을 강의해 온 장하석 박사는 ‘과학, 철학을 만나다’에서 ‘과학을 의심하라’ 한다. 이는 과학의 오류를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과학역사의 이론을 단순히 수용하여 가지를 치는 맹신과 응용에 머무르지 말고 ‘진정한 과학이 무엇인가’의 과학의 근본 진리를 현대의 재현을 통해 터득하여 자기화하라는 의미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과학적 정의에 일침을 가하며 ‘과학철학으로의 확인을 통해 그 근본적 정의를 깨닮음’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인류 정의의 근본은 우리 조경인들이 학문의 시작과 더불어 익히 실천하고 있는 자연시스템, 동양의 음양오행사상, 중용의 도(道)와 일맥상통함을 볼 수 있다. 첫째, 자연의 보존(preservation)과 보전(conservation)의 가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요소의 보호와 생태시스템의 안정화를 목표로 한다. 자연이 인간의 구성 집단인 도시로 요소의 유형과 비율은 조정되었으나 그 시스템은 안정화되어야 한다. 자연의 공생관계에 나타나는 유기적 진화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개인적 쾌락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시스템의 건강성을 위해 함께 새로운 방향을 위해 나아가는 자기조직화가 필요하다. 둘째, 음양사상에서 보이듯 해와 달, 하늘과 땅, 남과 여가 대립이 아닌 상보적 조화를 통한 상생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의 조직구성과 문제발생 때 해결에 이르기까지 생극제약(生剋制約)관계가 삼라만상 물질운동의 근본원리임을 인식하며 풀어가야 할 것이다. 개인주의와 공리주의, 공공성은 대립하는 이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지속가능한 공생을 목표로 상호간의 약속을 실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도다. 중(中)은 양극단의 가운데, 양극에 고루 나누어주기 아님에 신중해야 한다. 기울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안성맞춤이며 용(庸)은 평범하면서도 영원하다는 뜻이다. 지천에 널려있고 적정히 있어 우리가 함께 용량 내에서 공유하는 지속가능한 삶이다. 기울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中庸. 처음엔 한 가지 도리만 논하다가 중간에 만 가지 일로 나누어지며 끝에 가서는 다시 하나의 도리로 모이는 자연의 원리. 양극화시대에서 다양성의 시대로 성장하는 경계에 있는 우리. 다시 하나로 인류는 모일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진리를 되새겨 ‘정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개인, 그리고 사회의 고민과 실천원리를 실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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