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병(아썸 대표·생태학박사)
세월호의 선장은 침몰중인 배에서 승객들을 버리고 9시 38분경 탈출하여 제일먼저 현장에 도착한 해경 123정에 구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각 배안에 남아있는 400여명의 승객들에겐 “선실이 안전하니 남아있으라”는 안내방송만 되풀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 선박사고 시 최후까지 배에 남아 승객들의 구조를 지휘하고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해야할 선장이, 제일 먼저 탈출하여 자신이 선장임을 밝히지 않고 다른 구조자들 틈에 섞여 1진으로 육지에 발을 디뎠다고 한다.

이번 세월호 재난사고의 초기보도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단연 수위에 오른 내용이다. 너무나도 끔찍한 이번의 해상재난사고의 전말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속속들이 밝혀지겠지만, 부적절한 위기대처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선장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문득 1950년 6.25 전쟁 초기에 국민들에겐 “국군이 인민군을 잘 방어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고 혼자만 제 1진으로 한강대교를 건너 도주한 이승만이 떠오른다. 그러고도 그는 4.19혁명으로 물러날 때까지 10년간이나 더 대통령직에 앉아 인자한 국민의 아버지의 이미지로 남으려 하였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화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그리고 금년 2월의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대형 사고들의 공통점은 인재였다는데 있다. 사고의 원인부터 수습과정의 부실함이 2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모습에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떨칠 수 없다.
일주일 이상 정규방송을 거의 중단하고 모든 매체가 세월호 침몰사고를 보도하고, 온 국민이 비탄과 슬픔에 빠져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국민들의 분노는,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함과 극대이윤 추구에만 열중했던 선사를 넘어서, 구조작업을 지휘하고 있는 정부당국의 무능력과 부적절한 처신에 쏠리고 있다.

허둥대는 사후조치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평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안전 불감증에 걸려있는가 발견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국민들이 걱정하고 분노하는 것은 이렇게 반복되는 대형 참사에도 불구하고 재난에 대비한 사회 안전 시스템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데 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어떤 병증 같은 것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켜 오면서 오늘날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사회시스템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사회체계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표방한 중국과 러시아조차도 오늘날 광의의 자본주의 시장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마도 인류생태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인간의 본성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이기적 DNA의 작동원리에 가장 부합하는 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일 수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스스로 자기구동력을 갖게 된다. 자본을 소유한 자의 철학이나 인격과 상관없이, 자본 스스로가 갖는 “극대이윤 추구의 원칙”이 작동한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자본은 인간의 노동을 살 수 있고, 자본을 소유한 자는 구매한 노동을 이용하여 더 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증가한 자본은 다시 자본을 소유한 자의 몫으로 축적되는 순환체계를 통해 상대적으로 극대이윤을 추구한 자본만이 생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한 자본은 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자본의 자기논리에 의해 지탱되어온 현대의 자본주의는 인간보다 자본이 우위에 서는 모순을 가져왔고, 이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인명경시풍조, 즉 안전 불감증 의 원인이라 본다.

이번 사고를 낸 청해진해운이 운영한 세월호는 선령이 20년이 넘은 중고 선박이었고, 리모델링을 통한 증설을 했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비정규직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선장조차 1년도 안된 계약직이었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사고 선박을 조종했던 항해사는 본사에 선박의 반복되는 기계적 결함을 수리요청 했으나, 제대로 고쳐지지 않아 퇴사를 했다고 한다. 선사를 경영하는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기업의 극대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값싼 중고 선박을 들여와, 인건비 싼 계약직을 쓰고, 수리비와 안전교육비는 최소로 줄이고, 승객과 화물은 최대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이 실어야 한다. 이것이 자본의 자기논리이다.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행정기관의 인허가, 검사, 인증 등의 감시체계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관료에 의한 통제시스템은 원칙에 입각한 공정함보다는 자본과의 커넥션 또는 인맥의 카르텔에 의해 병들어 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어 우리자신도 무감각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무한경쟁시스템, 승자독식주의, 출세지향주의는 인간의 가치가 돈과 권력에 의해 평가되어지고,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갈수록 인색해 진다. 오늘날 공정한 사회유지의 중요한 한 축인 사법제도 조차 자본의 지배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쯤에나 기업이윤보다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는 세상에 살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된다.

생태심리학에서 처음 대면하는 명제는 “느낌에는 윤리가 없다”이다. 이 말을 사회학적으로 풀면 “자본에는 윤리가 없다”가 된다. 수많은 생물 종중에 하나인 인간은 현재까지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난과 위기를 겪어왔다. 인간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약 30만 번 정도의 크고 작은 생명의 위기를 겪는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10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셈이다. 물론 대부분 본인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큰 사고가 주변에 있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곤 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40억 년이라는 기나긴 생명의 역사 동안 면면히 대를 이어 내려와 현재의 내가 존재함을 기억한다면, 우리 전생에 약 4000만 번 정도의 죽을 수도 있는 위기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느낌은 그래서 윤리가 없는 것이다. 워낙 가혹했던 환경 속에서 기구한 행운이 수없이 반복된 기적의 존재이기도 하며, 한편 혹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극복하고 적응해온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DNA가 우리 속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한편 이를 통제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함으로써 현재의 인류공동체문명을 이룬 것도 인간이다. 이것이 위대한 영장류 인간이 대뇌피질, 즉 전두엽을 발달시키면서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생명진화의 역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자본에는 윤리가 없지만, 사회공동체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 이를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명제도 확신해야 한다.

우리보다 사회 안전 시스템이 훨씬 발전된 선진국들의 예를 보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동안 양적 경제성장에 치우쳐서 미처 구축하지 못했던 사회안전망 확충, 인간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자본의 지나친 독주 등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할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기적(miracle)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존중받아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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