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매 화가의 구반포이야기 - '아파트에서 골목을 보다.', 제작년도:2014 크기:45.5 x 27.5cm 재료:watercolor on Arches rough


아파트단지로 꽃구경 가요.

아파트단지로 꽃구경 가요.

 

아파트단지에서 무슨 벚꽃축제? 방배동 삼호 아파트단지에서 벚꽃축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연적으로 나온 반응이다. 아무리 벚꽃이 좋다한들 축제까지 열 정도일까? 아파트단지가 아파트단지지 말이야. 그러나 웬걸, 축제 할만 했다. 도로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벚나무가 만들어내는 꽃 터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목적이 있는 이동, 건조한 이동만이 자신의 주된 역할인 줄 알았을 이 거리는 걸음을 멈춘 채 사진을 찍으며 봄기운을 만끽하는 이들에 당황했을 것 같다.

근처 구반포의 벚꽃도 삼호 아파트단지 못지않았다. 올해 봄 날씨가 정신이 나가서 봄꽃이 한꺼번에 피고 있다고들 하는데, 이 현상을 그대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개나리, 벚꽃, 목련, 자목련, 진달래 등등 봄의 화려함을 알리는 봄꽃은 죄다 있었고 건물을 훌쩍 넘어 자란 메타세콰이어도 여린 잎을 싹 틔우고 있었다. 단지와 단지 사이의 도로를 따라 형성된 삼호 아파트 벚꽃 길과는 달리 단지 내부에 꽃길이 있는 구반포는 차분히 봄을 즐기기에 적당했다.

시간의 힘
처음에는 ‘와!’하며 꽃구경 하는데 정신이 팔렸었는데 천천히 둘러보니 아파트 단지의 풍경은 장소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디는 해가 좋아 벚꽃이 모두 만개했지만 어디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했고 어디는 자목련이 경관의 주인공이었다. 다채로웠다. 박춘매 화가의 그림 속 장소는 특히 좋아하는 곳이란다. 이유를 여쭈어 보니 골목길 같아서라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누가 아파트단지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림으로 봐서는 모를 것 같다. 시각적으로 앞뒤가 모두 뚫려 있지 않고 나무가 높아 위요감이 있다. 길 끝은 한쪽으로 꺾이면서 모퉁이 길이 되었다. 저 끝에서 누가 나타날까 기대가 된다.

초기 아파트단지는 대량생산을 위한 서구의 기능주의적 계획원리를 철저히 따랐다. 녹지와 놀이터, 노인정 같은 편의시설을 효율적으로 갖추었고 교통 같은 인프라도 살뜰히 고려되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당연히 합리적 기능주의의 단점도 있다. 동일한 주동 형식과 배치, 동일한 단위 주호의 연속. 획일화. 성냥갑 아파트라는 오명. 물론 나무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심겨졌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건설 경기 부양을 위한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사 간의 경쟁이 심해졌고 조경도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덕분에 조경 설계 언어도 다양해졌고. 하지만 초기의 아파트 조경은 심심했다.

구반포 단지에서도 단조로운 규칙을 찾을 수 있다. 화단의 가장자리를 따라서는 회양목이 심겨있고 벚나무는 균일한 간격으로 심겨있다. 특화된 식재공간도 광장도, 수경시설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 규칙이 많이 흐려졌다. 경관은 시간과 협상하면서 자발적 특화를 했다. 또 어떻게 보면 삼호 아파트나 구반포단지의 벚꽃 길은 규칙에 시간이 더해져 가능한 경관일 수도 있다. 도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그렸던 벚나무가 이렇게 멋진 경관을 연출할 것이라 설계가는 예상했을까? 시간의 힘이다.

최근 만 시간의 법칙이 SNS를 타고 퍼지고 있다. 저자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과 연구자들은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책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한 수련의 시간으로 만 시간을 책정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여섯 시간씩 5년 혹은 매일 세 시간씩 10년 수련을 쌓으면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흉내 내 ‘아파트 30년 법칙’이라 명명해 볼까? 아파트도 30년이면 꽃 축제를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말이다. 구반포는 조성된 지 40년이 되었고 삼호아파트단지는 30년이 되었다고 하니 우린 벌써 두 개의 검증된 사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시간은 성장만을 돕지 않는다. 눈을 돌려 건축물을 바라보면 그것들은 반대의 방식으로 시간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튼튼해 보이기는 하나 구식으로 보이는 디자인, 군데군데 나타난 시멘트 균열을 가리기 위해 덧칠한 페인트 자국들. 나무는 심겨진 순간부터 성장을 시작하지만 건물은 세워진 이후부터 쇠락의 길을 시작하지 않던가?

이 오래된 아파트에서 시간을 가운데 두고 나타나는 대조적 현상에 여러 생각이 겹친다. 눈에 보이는 나무와 건물만으로는 읽을 수 없는 반포의 시간에 대해서. 경관은 자연적, 인간적 요소들이 시간 속에서 작동하고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기에, 의미를 갖는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할 때 반포아파트 단지는 어떠한 사회적 과정을 겪었고 어떤 의미를 지닐까?

시절의 한 마디가 지나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반포아파트 단지를 중산층이라는 시선으로 분석한다. 압축 성장의 과정을 통해 중산층이라는 일정한 소득 수준을 갖춘 계층이 형성되었고, 용산 이촌의 맨션아파트 이후 아파트는 젊은 세대 중산층을 위한 ‘현대적 문화생활’의 터전으로 각광을 받으며 구반포와 여의도 등지로 세를 넓혀갔다(박해천(2011), 콘크리트 유토피아). 1970년대 초 구반포 단지의 분양이 시작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고 아파트가 투기의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부터다. 독일제 쌍둥이 칼과 일제 코끼리 전기밥솥, 마이카, 단란한 4인 가족과 함께 30평대 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IMF를 겪으면서, 최근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중산층 이미지에도 균열이 갔다.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반포단지도 당연히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아파트단지에서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진 않지만, 이 아파트 단지가 지어질 때부터 살았던 원주민들도 이제 나이 먹었다. 젊은 날을 투사했던 이 곳에서 더 살고 싶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은 육체적으로 무리라 이사 나가기도 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이 떠났다. 또 새로운 주민들이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구성원들의 들고 나는 변화는 아무것도 아닌 더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벚꽃 만연한 반포주공 1단지는 그대로이나 반포주공 2, 3단지의 경우 이미 재건축이 이루어졌고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1단지도 재건축 될 것이다. 반포아파트단지의 물리적 나이는 어떤지 몰라도 사회적 나이는 다한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벚꽃을 봐서 그런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떠오른다. 세상을 구성하는 힘도, 추구 가치도 달라지고 있다. 다음에는 무엇이 이 동네를 작동시킬 것인가? 구반포의 봄은 또 어떻게 변할 것인가?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저작권자 © Landscape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