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세헌(가천대 교수/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회장)
몇 년 전부터 시작된 국민들의 걷기 열풍으로 전국적으로 조성된 걷기 길만 해도 595곳에 이른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금은 ‘걷기’ 전성시대라 말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제주올레길, 해파랑길, 북한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남해바라길, 금강산소나무숲길, 구불길, 갑천수리길, 여강길,외씨버선길, 강화나들길, 토성산성어울길, 소백산자락길, 평화누리길, 유교문화길등이 걷기 좋은 장소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시민들에게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양지천길, 계절길 등 다양한 서울의 숲길을 ‘서울 두드림길’로 명칭하여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다양한 이름의 걷기 좋고, 걷고 싶은 길이 주목받는 세상이 되었다.

다양한 길에서 걷기를 즐기는 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매력 중 하나는 빠른 속도로 가면서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을 걷기를 통해 다시 보고 얻는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삶의 여유를 찾고 느림의 가치를 실천하자는 달라진 가치관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들도 걷기 열풍에 한몫 했다. 걷기 열풍의 시작은 아마도 국내에 보급된 스페인의 도보순례길인 ‘산티아고 가는 길’이 여행 에세이 등을 통해 2006년 이후 소개되고, 2008년 제주 올레길이 열리면서 그저 길을 따라 걷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객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을 지켜보며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내 문화유산과 연계한 걷는 코스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국민생활체육 참여실태 조사에 따르면 ‘걷기’는 생활 체육 참여 종목에서 31.8%로 1위를 차지했다. ‘제주올레길’의 등장이후 6년 이라는 짧은 시간에 ‘걷기’라는 단순한 여가 활동이 전 국토의 풍경과 국민의 삶을 바꾸고 있는 점은 매우 놀랍다.

최근의 걷기 열풍은 ‘걷기의 재발견’이라 할 만하며, 이제는 가장 트렌디한 삶의 패턴이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옛사람들의 걷기'의 저자 이상국은 국민들 사이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의 근원을 우리의 선인들에게서 찾는다. 저자는 지금의 걷기가 건강과 웰빙, 혹은 힐링과 치유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선조들의 '걷기'는 삶의 뜻을 새기고 걸음마다 깨달음을 구하는 공부의 길이자, 마음을 닦는 수행의 방편이었다고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웰빙과 건강을 생각하는 트렌드가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건강까지 챙기는 걷기 여행을 이끌었으며 자연을 유쾌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걷기 여행의 붐을 북돋웠다고 말한다. 동아대의 정희준 교수는 현재의 걷기 열풍에 대해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운동 등과 맞물려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도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는 현대인들의 특성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우리의 생활 터전이 도시화될수록 개인은, 몸은 소외된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보자. 끊임없이 밀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그리고 온갖 통제할 수 없는 소음들. 보통의 경우, 걷기란 일에 필요한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한 걷기, 즉 노동의 연장선일 따름이다. 게다가 걷다가 지쳐도 마땅히 앉을 곳이 없는 비인간적인 길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길을 나서는 행위는 '저항'내지는 '모험'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즉, 걷기란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현대성에 대한 도전이다.

지금 걷기 열풍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다양한 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한 것 같다. 지금의 열풍이 현대성과 도시의 환경 문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의 분출이므로 도시의 환경에 대한 반성과 재조명이 필요하며, 도시의 공원과 녹지 그리고 보행가로 만들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요구된다. 특히 멀리 있는 둘레길 올레길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걷는 길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있어야 하고,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길은 대단하지도, 값비쌀 필요도, 거대할 필요도 없다. 내가 사는 동네에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어, 바다 건너 섬에, 산맥 너머 타향에, 내가 걸을 길을 찾아 헤맨다는 지금의 걷기 열풍은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이다. 365일 대부분을 내가 사는 마을이나 동네가 아름답지 않은데, 1년에 겨우 3~4일 걷는 곳이 아름다운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평생 사는 마을이, 시골이, 도시가, 거리가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다움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내가 매일 보고 경험하는 동네가 추악한 원색 광고판으로 가득한데 평생에 한 번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 기적같이 영성을 준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민적인 관심인 걷기 열풍의 끝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길과 환경에 관심이 집중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도시의 공원과 녹지는 좀 더 유연하고 치밀하게 도시의 가로와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동안 잊고, 잃고 빼앗겼던 동네 골목길과 동네 거리, 도심의 옛길과 우리의 삶의 공간을 다시 보고, 되찾고, 보살펴 되살려야 한다. 우리가 현재 잃고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길의 가치와 새로운 조경의 접근을 생각하며 걷기 열풍의 중심에 있는 길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할 때 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드 브르통은 "걷기는 나르시스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는 맛과 사회적 관계 속에 제자리를 찾게 함으로써 인간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느리게 걷지 않았더라면
이 산책길의 꽃을 발견 하지 못했을 것이고
잠시 쉬어서 꽃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이 작은 하얀 꽃은 꽃밭속에 떨어진 휴지쯤으로 보였겠죠
걷기는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을 넓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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