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매 화가의 위풍당당 1909 x 60.6cm acrylic on Arches rough


1. 당당한 화분들

박춘매 화가의 화실에서 처음 이 그림을 보고는 화분들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었다. 화분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환영받기 위해 대중 앞에 선 군인들 같기도 했고, 멋진 연극을 마친 후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무대 위에 선 배우들 같기도 했다. 또는 각자 가장 자신 있는 포즈로 런웨이에 서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델 같기도 했다. 화분들은 군인이며 배우 혹은 모델인 것이고 노란 콘크리트 담은 단상이면서 무대이고 런웨이인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형태의 화분들은 비올라, 팬지, 술채꽃, 나리꽃 등등 모두 다른 꽃을 가슴에 앉고 담 위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 압도의 시간에서 벗어나 생활인의 눈으로 풍경을 분석하다보면 그리 당당할 것도 그리 당당하지 않을 이유도 없는 그저 평범한 풍경이다. 화분들은 ‘화분’이라는 것 빼고는 형태나 색에 있어서 어느 하나 일관성이 없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만든 화분들도 아니고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다. 식물들도 가꾸는 이의 특별한 의도나 원예적 지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생활인의 계산으로는 그리 값어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저 콘크리트 벽은 또 얼마나 애잔한가? 그럼에도 각자가 주인공다운 자세로 노란 콘크리트 담벼락 위에 서 있다. 화분들과 담은 자신들을 당당하게 봐주고 그려내 준 화가한테 감사해야 할 듯 하다.

어찌되었건 저렇게 다양한 화분을 가꾸시는 집주인은 어떤 분인지, 저 풍경은 어디에서 온 건지 궁금해 화가한테 물었다. 화가가 상도동 밤골마을에서 만난 풍경인데 원래 풍경 그대로는 아니라고 하신다. 화분이 몇 개 올려 있는 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 동네에서 만난 버려진 화분들을 더 올려 그리셨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원래의 풍경을 이루었던 화분들도 노란 담장집 주인의 것은 아니고 주민들이 버리고 간 것들을 주워서 자신의 집 담에 올려놓으신 거라고 한다. 그래서 화분의 형태도 색도, 그 안의 식물도 다 달랐던 것이다.


2. 상도동 밤골마을

화가의 이야기 중 버려진 화분이라는 대목에서 귀가 솔깃해졌다. 저 예쁜 화분들이 왜 버려졌을까? 어떤 이유로? 상도동 밤골마을은 어떤 동네이기에?

최근 서울시 뉴타운 출구 전략 발표 이후 주민들의 동의로 취소되었지만, 예로부터 밤나무가 많아 밤골로 불렸던 이 동네는 2006년 ‘상도7주택재개발정비 구역’으로 지정되었었다. 곧 동네가 사라질 것이라 여긴 주민들은 정성이 깃들긴 했지만 생활인의 입장에서는 갖고 가기 어려운 화분은 그대로 둔 채 동네를 떠났었고 남은 주민은 화분을 모아서 자신의 담에 올렸던 것이다.

높은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인 작고 아담한 이 동네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골목은 좁고 언덕배기에 맞추느라 휘어지기도 했다. 집도 공간적 여유가 없는지 담 위에는 장독대며 화분이 올려 있다. 마을 한 쪽에는 ‘밤골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도 있고 신림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도 있다. 저녁이면 각 집에서 내는 TV 소리와 숟가락 소리로 골목은 다소 시끄러웠을 것이고 주민들은 저녁을 먹고는 밤골상회 앞에 놓인 평상에서 수다를 떨거나 언덕을 산책하며 하루를 정리했을 것이다. 밤골마을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 몇몇 사진가들이 동네를 담은 사진을 모아 골목 입구에서 전시했을 만큼 정감 가는 동네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의 온기를 많이 잃었다. 계절이 겨울인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많은 집들이 비었고 몇몇 빈집은 쓰러질 듯한 폐가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천막으로 덮여져 있다. 집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곳도 있다. 재개발 취소가 반갑기도 하지만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니 심난하다. 저 화분의 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밤골마을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3. 그들의 당당한 삶인 것이다.

최근 많은 곳에서 뉴타운·재개발이 취소되었다. 이 지역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서울시는 얼마 전 물리적 환경 정비를 넘어 마을공동체 활성화, 일자리 창출, 지역정체성 보존 등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도시재생사업을 위해 '서울형 재생기구'를 신설하고, 4년간 1조 원 규모의 재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갑자기 우리는 큰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감상가 아니면 해결사의 입장으로 밤골마을과 같이 소위 달동네라 불리는 마을을 대했었다. 그런데 두 입장 모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었다. 감상가로서 조금씩 덧붙여지면서 만들어진 시간의 풍경은 매혹적이었으나 그렇다고 매혹적이라고 말하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었다. 그 곳 사람들의 불편을 외면하는 것 같아서, 더욱이나 전문가들은 직무유기가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또 해결가로서 이 곳은 무엇이 문제이니 이렇게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대안을 말하는 언어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콘크리트 담과 그 위의 화분에 대해서 ‘사람살이가 느껴지네!’라고 말하는 것, 허물어질 것 같은 담을 없애고 형태와 색에 있어서 일관성 있는 텃밭상자나 화분을 나누어주자고 말하는 것, 둘 다 심리적 저항감을 주었었다.

이제 시대는 우리에게 다른 상상과 실험을 요구한다. 먼저 저들의 삶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해야 하는지 입장정리부터 해야 한다. 감상자의 접근도 해결사의 접근도 아닐 텐데 쉽지 않다. 감상자나 해결사는 둘 다 삶의 공간을 대상화한다. 특히 전문가들은 저들의 삶을 프로젝트의 ‘대상지’로 인식하기 쉽다. 더구나 자신이 속한 분야의 시선 즉 어떤 주제라는 렌즈를 통해서 삶의 장소들을 바라다본다. 조경가는 조경가의 특정한 시선으로, 건축가는 건축가의 특정한 시선으로.

이 대상화의 구도와 세분화, 주제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무수히 많은 예비 답안 중에는 보는 이까지 어깨를 펴게 만드는 화가의 그림도 있지 않을까? 화가가 평범한 화분을 하나하나 주인공으로 그려냈듯이, 그들의 삶을, 그들의 집을 그리고 그들의 삶의 얼굴인 풍경을 주인공으로 대하듯이, 또 화가가 하나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며 풍경과 친해지고 공감하고 그러면서 그들의 삶이 담백하게 드러나도록 도와주듯이.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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