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승범(이우환경디자인(주) 대표·(사)한국조경사회 부회장)
드디어 그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번뜩이는 눈빛과 날카로운 발톱을 속에 감추고 호시탐탐(虎視耽耽) 기회를 엿보던 맹수가 먹잇감에 결정타를 날릴 순간을 포착한 듯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지난 2월 14일 ‘수목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수목원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 되었다. 법률의 내용을 개정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제목까지 바꾸어서 말이다.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라는 엄청난(?) 작명으로. 물론 발의의 형식은 ‘의원입법(議員立法)’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나, 그 속내는 ‘산림청의, 산림청에 의한, 산림청을 위한 청부입법(請負立法)’임을 우리가 알고 그들이 알고 있을 터. 진즉에 중량감 있는 예고편-2개월 전 산림청에서 제시한 ‘정원문화 확산 및 산업화 대책(안)’이라는 제법 치밀하게 준비된 보고서-으로 조경계를 살짝 긴장하게 하더니 제대로 된 본편의 출사로 숨통을 조이려는 듯 보인다. 정원(庭園)도 모르면서...

인류의 정주역사(定住歷史)와 함께 시작된 정원은 오늘날 우리가 조경(造景)이라 부르는 활동-학문, 기술 등-의 모태(母胎)이며 뿌리라 할 것이다. 또한 오랜 세월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진화하여 온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 또한 그 쓰임새와 조성기법 등이 다양해져 여러 형태로 분화 내지 확산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의 정원은 개인을 위한 공간이기만 하였으나 시민사회의 등장으로 공공(公共)이 이용하는 정원의 요구가 ‘공원(公園)’을 탄생시키는 등 정원은 시대에 따라 생활상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으며, 정원의 문화적 진화는 계속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정원이 단순한 법조문적 정의나 구분만으로 간단히 규정되고 설명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림청이 마련한 수목원법 개정안에서는 정원을 ‘식물, 토석 등을 재배·배치·전시하거나 가꾸기 등을 통하여 유지·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문화적·교육적 또는 환경적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이러한 정원이라는 것을 산림청장이 조성하거나 지정하는 ‘국가정원’, 지방자치단체가 조성·운영하는 ‘지방정원’ 및 법인이나 개인이 조성·운영하는 ‘개인정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고 발칙한 꼼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우선 바꾸겠다는 법안의 제목부터 보자. 산림청관계자는 법률명칭 개정이유를 수목원과 정원을 동등한 분류로 명시하기 위함이라 하였다는데 근본적으로 수목원과 정원은 병치(竝置)시킬 수 있는 등가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넓은 의미의 정원은 공원(공공의 정원-실례로 옴스테드는 영국의 버큰헤드 파크를 시민정원(people’s garden)이라 불렀다), 수목원(수목을 주소재로 한 정원), 식물원(식물을 주소재로 한 정원) 등을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앞서의 개념들이 이미 정원과 분리되어 각각의 용어로서 고착화 한 것으로 간주한다면 좁은 의미의 정원인 개인적 공간으로서의 정원이 된다. 넓은 의미든 좁은 의미든 수목원과 정원은 도시공원과 녹지처럼 나란히 세워 끌고 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정원의 정의 역시 정원의 본질을 적확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정원은 사유(私有)의 공간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기호에 따라 조성되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자기만족의 공간이다. 정원은 식물, 토석을 재배하거나 배치하지만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정원박람회나 가든 쇼 등에 조성된 정원은 정원의 형태를 보여주기 위한 시범공간이지 진정한 정원으로 볼 수 없다. 박제된 정원은 정원이 아니다. 개인의 취향에 맞춰 조성되고 관리되는 정원에선 반드시 교육적, 환경적 가치가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들에 비추어 수목원법 개정안 제2조 제1호의2는 정원보다는 식물원의 정의-식물유전자원의 수집·증식·관리 등 보완이 필요하겠지만-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정원의 구분 또한 매우 억지스럽다. 산림청이 일부 후원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을 염두에 둔 듯 작심하고 ‘국가정원’이라는 해괴한 용어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물론 막대한 예산을 들여 박람회장을 조성하고 성대히 국제행사를 치렀으니 사후 유지관리를 고려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나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은 이미 도시공원과 자연휴양림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에 다양한 형태와 소재로 조성된 모델 정원들을 테마로 하여 일정기간 전시행사를 개최한 장소이다. 각종 정원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큰 정원이 되지는 않는다. 일정 지역에 집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큰 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을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은 정원을 테마로 하여 조성된 주제공원의 성격이 짙다. 박람회가 끝난 이후 더더욱 이용객들에는 공원으로 인식되고 그러한 이용행태가 일어날 것이 자명하다. 답은 분명하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은 국가정원이 아니라 ‘국가공원’이 되어야 한다.

엊그제 2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다케시마의 날 행사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천년 넘는 세월 우리 땅으로 실효지배를 해왔으나 불과 1세기 전 잠시 침략에 의해 강점했던 이력을 앞세워 다케시마라는 얼토당토 않는 이름을 붙여가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만으로 모자라 국력이 앞서는 것을 빌미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영토분쟁 제소의 욕심을 키우고 있는 일본정부의 후안무치한 행위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학문과 업의 뿌리를 정원에 두고 지내온 조경계의 목소리를 외면 한 채 단 한 번의 정원박람회 지원으로 정원의 주인임을 내세우며 제도권의 힘을 이용해 합리적이지 않은 법 추진을 꾀하는 산림청의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조경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도’와 ‘정원’이 다르게 쓰고 같은 음으로 읽혀지는 현실이 슬프고 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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