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소년’ 김웅용이 있었다.

그 소년은 IQ가 210이고 돌 때에 이미 한글과 천자문을 떼고 세 살의 나이에 미적분을 풀고 4살에 4개 국어를 구사하며 한양대학교 과학교육과에 입학을 했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색동저고리 한복을 입은 꼬마가 미적분을 풀고 삼촌 뻘인 대학생들과 한 강의실에서 수학하는 모습이 있다. 부모가 모두 대학 교수인 그는 생후 7개월에 어깨너머로 보던 장기 두는 모습을 몇 번 보더니 차, 포 장기 알을 쥐면서 “차, 포” 라고 해서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로 생각됐단다. 이후 발휘되는 천재성은 만 3살 때 일기, 동시, 수필 등을 엮어 자서전 출간으로 이어지는데 어린이다운 상상력과 기발함 그리고 어른스러운 통찰력,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와 그림, 붓글씨 등이 담긴 ‘별한테 물어봐라’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해외에 번역까지 됐었다. 만 7세에 미국 콜로라도대학교에서 ‘핵/열물리학’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만 10세에 미 항공우주국 NASA의 연구원이 되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도 머지않아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그러던 그가 돌연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입검정고시를 거쳐서 충북대 토목공학과 81학번이 되었다. 당시 메스컴은 그를 ‘실패한 천재’라고 호도를 해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했다.
미국 NASA 선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주어진 과제와 수학문제를 기계처럼 풀기만 했다. 한 분야를 위해 20개 이상의 연구실에서 함께 작업을 했지만 옆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생활이었고 비밀주의에 갇힌 천재의 업무에 대한 공은 대부분 윗선에서 차지하는 환경 속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 형제와 떨어져 살면서 힘들다는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천재에게도 쉽게 극복할 사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근래에 카이스트 학생들의 잇단 자살 사건도 우리 사회가 부여한 부담감에 대한 탈출구가 없었던 것인데 그는 일찍이 이런 것을 경험을 하고 모든 것을 청산하고 국내로 돌아온 것이다. 국내 대학 입학을 위하여 대입체력장에 나타난 그는 과거의 천재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약한 청소년 중의 하나였고 대입검정시험에 하위 합격하고 지방대학에 입학했다는 차디찬 눈으로 언론에 비쳐졌다.

그에 대한 메스컴 보도가 몇 년 전에 다시 등장했다. 충북지방공사에 근무하면서 가족과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고 저녁 퇴근 후에 동료들과 대포 한 잔 하는 평범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보도를 했다. 부하 여직원은 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천재였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비운의 천재 ‘김웅용씨는 금년부터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한 신한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부임한다는 보도가 다시 나와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머리가 좋은 천재로 주목받거나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가족, 이웃과 따듯하게 소통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그에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제는 모두가 놔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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