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춘매 화가의 '초록대문 집', 2010, watercolor on Arches, 70X60.6cm


1. 뜨는 동네 성북동

최근 한남동 꼼데 가르송길이 뜨고 있고, 경리단길이 뜨고 있다. 해방동도 뜨고 있다. 이번 호에 다룰 성북동도 뜨는 동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뜨는 동네’라고 써넣고 보니 ‘뜬다’라는 표현이 뭔가 싶다. 낯설다. ‘뜬다’라? 보통 연예인을 대상으로 ‘뜬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대중들 관심의 수면 아래 있던 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소위 ‘뜬다’고 한다. 대중들은 뜨는 연예들을 좀 더 자주 보기를 원하고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는다. 덕분에 대중매체 노출 빈도도 높고 관련 기사도 앞 다투어 나온다.

뜨는 동네도 마찬가지다. 대중들은 그 동네를 알고 싶어 하고 매력을 즐기고자 한다. 그래서 그 동네를 걷고 사진에 담는다. 덕분에 요즘 뜨는 동네 성북동에는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답사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운영된다. 그러다 보니 성북동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분위기 좋은 음식점과 카페도 여럿 생겼다. 또 역으로 이런 카페와 음식점 때문에 성북동을 찾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뜨는 동네가 갖는 특징이다.

성북동은 뜰만 한 동네다. 자원이 많다. 북쪽으로 북한산이 서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한양도성이 부채꼴로 동네를 에워싸고 있다. 또 최순우 옛 집, 이종석 별장, 상허 이태준 고택 등과 함께 서울 한양도성, 선잠단지, 가구박물관, 성락원, 심우장, 간송미술관 등 역사, 문화자원이 풍부하다. 나폴레옹 빵집이나 금왕돈까스같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음식점들도 곳곳에 있다. 성북동에는 건축가들의 작업실이나 특색있는 공방, 화랑도 많다. 심미안을 가진 이들이 성북동이 뜨기 전에 먼저 성북동의 매력을 알아보고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동네는 문화적 감수성도 높다.

2. 성북동의 집들
성북동을 걸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역사, 문화 자원을 연결하는 코스의 길이가 만만치 않다. 많은 이들이 여정을 시작하는 한성대 입구에서 최순우 옛집을 거쳐 심우장과 한양도성에까지 이르는 길은 꽤 길어서 지도로 보면 저 길을 어찌 걷을까 싶다. 하지만 막상 성북동에 들어서면 골목길을 따라 집 구경하는 맛이 있어 걸음이 고되지 않다. 아파트단지나 다세대 다가구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와 달리 오랜 기간 천천히 만들어진 성북동 집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나폴레옹 빵집 뒤쪽의 한옥들이며 1970, 80년대 풍경 같은 철물점, 사진관, 이발소나 오래된 집을 개조해 만든 카페를 발견하는 재미로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보면 애초 가려했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잊게 된다. 성북동 집들은 아주 직설적으로 ‘사는 집’이라고 말해주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아파트는 그 안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느 어느 아파트는 이미지로 그곳에서의 삶을 상징할 뿐이다. 반면 성북동 집에서 만나는 삶은 노골적이다. 집주인이 부지런한지 어떤지, 취향은 어떤지, 사는 형편은 어떤지 등등 그대로 말해준다. 북악 스카이웨이를 중심으로 위쪽에 밀집해 있는 대형 단독주택들은 누군가에게는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3. 성북동 ‘그’ 집
운이 좋다면 성북동의 집들에서 자신의 어떤 정서가 투사되는 집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릴 적 살던 집과 비슷하다던 지,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고 꿈꾸었던 집과 유사하든지, 사모하던 누군가가 살던 집과 닮았다든지. 이런 집에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욕망이 투영된다든지.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집은 각자의 ‘그’ 집이 된다. ‘그’는 눈앞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없는 존재를 지칭한다. 지금의 이 공간에 없는 무언가. 다분히 인식적 지칭이다. 그러므로 ‘그’ 집은 우리 집도 친구네 집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머리에 각인되어(인식적 과정을 거쳐) 굳이 지칭하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집이다.

박춘매 화가에게는 초록 대문집이 ‘그’ 집이 되었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유년시절을 보냈던 금호동으로 40대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재개발로 옛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화가는 과거의 자신을 찾듯 사라진 옛집과 비슷한 집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2009년 어느 날 성북동 심우장 길 초입에서 비슷한 집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개나리 노랗게 핀 초록 대문집이었다. 그 이후 화가는 마치 자신의 집인 양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집 주변을 배회하며 향수를 달래고 과거와의 연장선 속에서 지금의 자신을 바라다보았다.

그 집은 봄이면 담 밖의 사람들에게 개나리를 선사했고, 여름이면 빨간 장미로 유혹했다. 이러한 풍경은 화가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10년 초여름 화가가 다시 초록 대문집을 찾았을 때는 여름 폭우로 지붕은 주저앉을 것 같았고 대문의 녹도 많이 퍼져 쓰러질 것 같았다. 물론 마음은 아렸지만 그 자리에는 있었다. 다행히도. 그런데 작년 가을 다시 가보니 축대는 그대로 인체 대문도 개나리도 장미도 사라지고 건축물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 집이 사라진 후 화가는 마음이 아파 그 근방도 가지 못하고 있다. 어렵게 찾은 집을 다시 잃어버렸으니.

화가는 성북동이 이렇게 뜨기 전부터 성북동에 ‘그’ 집을 마련했지만 이제는 더 많은 이들이 성북동을 찾고 ‘그’집을 마음에 담는다.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염려스럽고 쓸쓸하기도 하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성북동만의 매력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스럽고,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집들을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하며 죄다 잃어버리고 성북동에서 추억해야하나 싶어 쓸쓸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1990년대가 벌써 추억해야 할 과거가 되었나 싶어 쓸쓸한 것처럼 말이다.

최근 부동산 상품, 주거를 위한 기계(‘콘크리트 유토피아’, 박해천(2012))로서의 집이 도전받고 있고, 새로운 방향과 방식이 다양하게 모색되고 있다. 한옥마을로 조성해 성북동을 더욱 특색 있게 하겠다는 재개발 계획이 잡혀진 북정마을, 화가가 그 집을 만난 심우장 길과 성곽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북정마을에서는 비워진 집 하나를 미술관으로 바꾸어 마을사진을 전시하면서 전면재개발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고? 마을의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그 안의 삶까지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느냐고? 성북동의 그 집들 사이를 걸으며 추억 곱씹기를 넘어 우리의 집에 대해 고민했으면 한다. 성북동의 집은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그 집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는 집’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이다.  

 

김연금(조경작업소 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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