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규화(서울대 식물병원 외래임상의·농학박사)

지배층에 의해 시작된 나무 식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식량생산을 위해 과수와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도록 복을 주셨으며,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셨다고 적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께 이러한 오래된 기록들은 인간이 농경시대 초기에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단 인간의 자연지배가 정당화되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산림 파괴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숲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하지만 인간은 오랫동안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숲에서 멀어질수록 숲에 대한 향수는 더 깊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주변에 인공적인 숲을 조성하는 것은 대역사이기 때문에 권력이나 부를 가진 지배계층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테베(Thebes) 지역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를 보면 기원전 2500년께 고대 이집트 귀족들은 정원에 포도, 대추야자, 야자수 등 먹을거리와 그늘을 제공해주는 나무를 심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빌론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2세(B.C.605~B.C.562년 재위)가 고향의 산과 푸른 나무를 그리워하는 산악국가 출신 왕비 아미티스(Amytis)를 위로하기 위해 ‘공중정원(Hanging Garden)’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다른 형태의 정원으로는 아시리아에서 왕실이나 귀족들을 위해 조성된 사냥터가 있는데, 이러한 유형의 정원들은 모두 지배층이 자신들을 위해 조성한 것이었다.

한동안 왕과 귀족 등 권력층에 의해 조성되고 관리되던 유럽 정원은 중세시대에 이르러 수도원 내의 소박한 정원으로 바뀐다.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과 지주가 정원문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예술과 과학의 중흥기인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14~16세기)에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조성하는 별장이 커다란 흐름이었다. 바로크 시대(17세기)에는 정원과 공원, 오픈스페이스가 일종의 공식처럼 조성되었으며, 루이 14세에 의해 축조된 베르사유궁전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과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했고,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동양에서도 지배층에 의해 다양한 정원이 조성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주나라(B.C.1046∼B.C.771) 때부터 과수를 심어놓은 원(園), 채수를 심어놓은 포(圃), 동물들을 키우는 유(囿) 등 다양한 형태의 원림(園林)이 조성되었으며, 서양과 마찬가지로 왕실을 위한 사냥터가 조성된 것도 이때이다. 특히 한나라(B.C.206~B.C.220) 때에는 개인 정원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는데, 장안에서 멀지않은 무릉의 거상 원광환은 동서 4리, 남북 5리나 되는 정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제세왕 10년(B.C. 180년) 궁원에 복숭아와 배꽃이 만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왕궁에 정원을 조성하고 다양한 과수를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부터 궁궐의 정원을 관리하는 관원이 있었다는 것은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정원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높은 관심 하에 지속적으로 관리되는 정원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된다.


일반대중을 위한 나무 식재는 최근의 일이다
일반대중을 위해 공공공원(Public Park)을 조성한 것은 그 역사가 170년 정도에 불과하다. 170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산업혁명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증가한 도시 인구는 도시의 기반시설(infrastructure)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였다. 이로 인해 도시는 과밀해지고, 황량해지고, 산업 폐기물에 의해 오염되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구 집단이 자연과 분리되어 살게 되었다.

이렇게 열악해진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최초 공공공원은 1842년 개장된 영국 리버풀 프린스공원(Princes Park)으로, 자선사업가인 철강상인 예이츠(Richard V. Yates)가 토지를 기증하고 팩스톤(Joseph Paxton)이 설계하였다. 팩스톤은 1947년 문을 연 버켄헤드공원(Birkenhead Park)도 설계하였는데, 1850년 이 공원을 방문한 미국의 대표적 조경가 옴스테드(F. L. Olmstead)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1858년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Central Park)를 확장하기 위한 설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일반대중을 위한 공공공원이 도심에 건설되었지만, 산업쓰레기와 공해로 인해 열악해진 도심 환경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게 되자 새롭게 나타난 산업엘리트들은 쾌적한 생활환경을 찾아 교외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자들의 도심탈출은 도심 정부의 재정수입(재산세)을 감소시키고 이는 다시 환경개선을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하였다.

한편 사람들의 지속적인 도심탈출은 교외의 교통 혼잡을 심화시켰고, 교외에 살면서 도심에 있는 본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이로 인해 증가하는 통근비용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사람들의 도심 회귀 움직임은 도심의 활력을 회복시켰으며, 도심 정부로 하여금 도심의 쾌적성 향상을 위한 도시 숲 관리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공공원의 역사는 1909년 11월 일제의 강권에 의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개장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왕벚나무도 식재되어 무심한 시민들은 1983년까지 밤 벚꽃놀이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 최초 대규모 공공공원은 1973년 개원된 어린이 대공원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74년 한국종합조경공사가 발족되고 1980년 도시공원법이 제정됨에 따라 공공공원, 가로수, 아파트와 공공시설의 녹지 등 도심의 생활림 조성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게임을 준비하기 위한 일종의 도시미화운동은 짧은 기간에 많은 나무를 집중적으로 식재하는 계기가 되었다.

관리가 중요하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과 공원은 자연적인 경관과는 달리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관리자가 높은 관심과 관리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권력층이나 재력이 있는 개인에 의해 조성된 정원은 이들의 정원에 대한 높은 관심과 이를 관리하는데 필요한 전문가를 고용하거나 전정 등 관리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들 정원은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공공공원은 관리주체는 있지만 개인 정원과 비교하면 관심과 투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성만 해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정원이나 공원은 건강하지도,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따라서 공원이나 정원은 조성하는 것보다 조성 후에 그 기능이 유지되고 증진되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공원은 더욱 그러하다.

 

▲ 형식적으로 조성되고 관리되는 공원은 이용자들로부터 영원히 외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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