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경준((주)장원조경 대표·농학박사)

새정부가 들어서고 미래창조과학부가 새로 생겼다. 부처 장관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이 지명되었다가 외국국적을 가진 자가 우리나라의 장관이 될 수 있느냐는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결국 장관으로 지명을 받은 자가 자진 사퇴하여 일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으로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도 조경수를 심을 때 발주자에게서 ‘한국 전통(고유)수종으로 심어 주세요’하는 주문을 종종 받는다. 이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일천함에 놀란다. 사실 우리가 자주 심는 나무들이 전통수종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가 우리의 고유 수종인가? 느티나무는?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를 야산에서 자생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데 우리의 고유한 수종이 아닌 것은 아닐까? 이런 물음에 직면하면 고유수종이라고 할 수 있는, 심을 수 있는 나무가 얼마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의 일상에 심겨진 나무가 전통수종인가? 한국의 고유수종이라는 정의는 무엇인가? 옛날부터 우리의 산야에 자생하고 있는 나무가 고유 수종이라면 옛날의 정의는 언제부터인가?

외국계 한국인이 장관으로 추천이 되었을 때 이젠 우리도 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인이라도 우리가 필요하면 써야 진정한 국제화가 되고 우리의 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지 않느냐? 쇄국의 길을 걸은 조선의 말로가 어떠했느냐? 아니, 한국에 그렇게 인재가 없느냐? 미국국적을 포기도 하지 않는 사람을 그 자리에 왜 임명하려고 하느냐? 그자는 미국의 스파이다. 등등...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서 인신공격까지 온갖 주장이 난무하였다. 각자의 주장마다 일리는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있는 여러 수목과 풀들,어느 것이 우리에게 이롭고(?) 어느 것이 환경을 해치는가? 이롭다는 것은 무엇이며, 환경을 해친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물이란 원래 어떤 환경에 처하면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며 생존경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정착하면 이것이 천이이고 지구의 역사이지 않겠는가? 미국자리공은 안되고 쑥부쟁이는 괜찮고, 상수리나무는 되고 대왕참나무는 외래종이라 심지 말아야 되고, 금송은 일본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에 아산 현충사에 심으면 안 되고 중국이 원산지인 은행나무는 현충사에 거대하게 버티고 서있어도 되고.

모든 게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상태를 너무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의 근대사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해방 이후 갑자기 신사상이 몰려들어오니 많은 국민들이 혼란스러워 했고 나라는 혼돈 그 자체였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 따로 없었다. 나라가 잘 되려면 자본주의 만이 살 길이다. 공산주의로 가야한다. 미국을 따라야한다. 삼균주의가 어떻다, 물론 한바탕 뒤집어지기를 원하는 무리도 있겠지만 이러한 격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현상이다. 우리가 안정을 취하는데 상당한 세월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했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지금도 과거사 진상규명이니 00사건의 복권 재판이니 하며 잊힌듯한 사건들에 기운을 쏟고 있지 아니한가? 천천히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게 변화해야 조화롭게 발전한다는 것이 진리이다.

우리의 국토를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불러 왔다. 오랜 세월을 거쳐 식물과 자연이 잘 어우러져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외래의 식물이 들어와서 금수강산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상태로 유지된다면 그 또한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다. 이미 국제화의 길로 들어선 현대에서 우리의 고유한 수종으로만 한반도를 가꾸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밀물이 밀려오듯 들어오는 외래 수종을 어떻게 유효 적절히 사용하여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느냐가 조경인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생태적으로도 교란되지 않고 점진적인 변화도 추구하면서 더 나은 경관도 창출할 수 있는 수종의 도입이야 말로 조경의 발전에 관건이 된다.

도입된 여러 외래식물들과 황소개구리, 대형쥐 뉴트리아, 붉은귀 거북 등이 우리의 산천을 교란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번 자연계에 퍼진 종들을 없애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문제의 소지가 되는 생물을 도입할 때도 신중하여야 하며, 이미 퍼져 문제가 되는 종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연구와 대책이 필요하다. 필요에 의해서이건 잘못된 경로를 통해서이건 이미 우리의 자원이 된 것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길가에 시원스레 뻗어 늘어선 메타세쿼이아나, 대왕참나무를 보면서 왜 우리의 산하에는 저렇게 늘씬한 수목들이 별로 없을까하고 자문해 본다. 이렇게 이국적이면서도 때로는 멋있게 보이는 나무들이 우리의 정원과 공원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자리를 대신할 우리의 고유수종은 없을까? 왜 굳이 고유수종으로 이 나무들의 자리를 빼앗아야 할까? 아니면 이 나무들이 우리의 경관을 해치고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의 조경소재로 한부분이 되어버린 이들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우리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일까? 이들은 한반도의 토종과는 이질적이므로 다르게 취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어느 현장에서 대왕참나무와 메타세쿼이아가 우리의 고유수종이 아니라고 교체할 것을 요구받았다.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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