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규(푸르네 객원 정원사·영국 에식스대 위틀칼리지 박사과정)
한국에서 조경 디자인을 십여 년간 ‘업’으로 해왔지만, 나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간혹 지나는 말로 종합예술이라고 하며 웃었지만, 조경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싶은 갈증이 늘 있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하고, 젊은 날의 열정을 바치고 있는 일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영국행을 결정했다. 영국하면 정원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이곳에서 정원을 공부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 사진을 통해 보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영국의 정원들을 상상하고, 우아하게 영국정원에 앉아 애프터눈 홍차를 한잔 마시는 그림을 떠올리며 영국을 찾았다.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고, 우아한 이미지의 영국 정원이 내게 줄 일종의 영감을 기대했다.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많은 정원을 방문하면서 영국정원의 역사를 만났고, 정원을 가꾸면서 즐기는 특별한 사람, 평범한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이런 많은 만남을 통해 정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상속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정원 본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국 정원에서 발견한 정원의 본질은 한 장의 그림이 아닌 항시 진행 중인 ‘프로세스’라는 것이다.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자면, 일을 하면서 정원을 가꾸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 공사가 끝나면 성립되는 한 장의 그림 같은 정원을 위해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다. 정원은 아름다움이 정지된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이다. 때로는 비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다양한 식물과 향기로 가득 차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속에서 사람, 정원, 식물은 모두 제각기 자신이 지금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며, 조급하게 꽃부터 피우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며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것처럼, 정원을 만드는 과정은 그것을 관리하려 노력하고 그 안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 RHS 첼시플라워쇼에 입장하기 위해서 줄서있는 사람들

작년 영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정원쇼라고 하는 첼시 플라워쇼를 관람하던 중 영국 노신사를 만났다. 출품된 정원을 한참이나 관심 있게 바라보시고 난 후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정원 훌륭하기는 하지만, 우리 집 정원이 더 좋은데.” 순간, 저분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혹시 숨은 정원의 고수가 아닐까? 영국, 또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당당히 우리 집 정원이 더 좋다고 말하는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분은 정원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신 정말 평범한 영국신사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난 후 정원에 대해서 물어봤다.

“지금 보고 계신 정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요,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정원 잡지에 있을 때 더 멋있을 것 같네요. 얼마나 오래 이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잡지에 있어야 오래가지요. 우리 집 정원은 뛰어난 디자인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매일 아침 나를 정원으로 불러내고 내가 그 안에서 자연과 소통하도록 만들어주지요. 내가 지금까지 건강을 잃지 않고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원 일을 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RHS 첼시플라워쇼를 즐기는 사람들
데이비드 쿠퍼는 그의 저서 ‘정원의 철학’에서 정원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얻어지는 치유의 결과는 의식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보다 크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효과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디자인된 행동-정원에서 우아하게 차를 한잔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 등- 보다는 봄이 되면 자연스럽게 꽃씨를 뿌리고, 여름이 되면 매일 아침 고개를 내미는 잡초들을 뽑아 퇴비를 만들고, 가을이 되면 내년 봄을 기약하며 꽃씨를 받거나 열매를 따는 일, 그리고 겨울에는 작은 온실에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 동안 정원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원에서 기쁨을 얻고, 그 기쁨이 스스로를 치유해준다는 뜻이다. 우리가 정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아내는 영국왕립원예학회에서 운영하는 정원실무과정을 듣고 있는데, 봄이 되면서 3주 연속으로 얼었던 땅을 돋우는 작업을 했다. 육체적으로는 몹시 힘들어 했지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항상 기분이 좋다고 했다. 정원에서 땅을 파고, 거름을 채우고 헤집는 사이에 땀이 흐르고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같이 공감하는 일들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이 아내의 마음에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 쿠퍼가 정원일은 가장 ‘순수한 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일 것이다.

정원은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필요한 부분을 아낌없이 채워주는 곳이 바로 정원이다. 하나의 완성된 사진으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이 아닌 사계절 즐거움이 가득한 정원이 우리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 것이다. 즐거움을 가득하게 하기 위해서 전문가가 손대지 않으면 절대로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거창한 정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정원을 만들고 매일 아침 정원에 나가는 것이다. 정원이 성장해가는 과정(프로세스)에 참여하여 정원이 깊어지는 만큼 나도 함께 깊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도 모르는 기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연재를 마치며.
영국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정원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원과 함께 하면서 새로운 기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그 놀라움과 기쁨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칼럼을 시작했는데, 너무 부족한 글로 인해 오히려 정원을 아끼는 분들께 누를 끼치지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영국은 이제 정원일의 계절인 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과 그 속에서 즐거워하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을 다른 기회에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칼럼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국의 보통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정원문화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을 예정이고, 5월에 있을 첼시 플라워쇼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조경신문을 통해 함께 할 예정입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이른 봄,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정원을 산책하는 할아버지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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