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규(푸르네 객원 정원사·영국 에식스대 위틀칼리지 박사과정)
요즘 영국은 6개국 럭비대회가 한창이다. 럭비는 축구 못지않게 영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스포츠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럭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요즘 럭비의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물론 영국하면 떠오르는 스포츠는 프리미어리그가 대표하는 축구이지만, 영국의 프리미어리그는 지나치게 국제화 상업화되어 더 이상 영국 문화가 아니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럭비는 아직도 영국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스포츠라고 이야기 되고, 많은 영국인들이 열광하고 있다.
럭비는 굉장히 잔인하고 거친 경기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 거친 면을 통제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정신력이 강조되고, 심판의 통제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경기이다.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보면 영국 영토에는 역사적으로 미개하고 거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문명화 과정에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규범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것이 영국을 신사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럭비를 보면 이러한 영국의 역사가 잘 반영된 스포츠가 아닌가 생각한다. 재미있게도 영국에서 가장 많은 여성이 열광하는 경기가 럭비인데, 열 명 중 세 명이 여성 관중이라고 한다.

럭비 경기는 손과 발을 다 사용할 수 있지만 손으로 하는 패스는 반드시 뒤에 따라오는 선수에게 해야 한다. 공을 든 선수는 앞으로 전진 하면서 뒤에 따라오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잘 파악해야 하며, 뒤에 따르는 선수들도 미리 공간을 예측하고 공을 따라 전진해야 한다. 앞으로 전진 하되 뒤에 따라오는 선수들과의 조화가 점수를 내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두세 명의 선수가 뒤에서 그 선수를 밀어 조금 더 많이 전진할 수 있게 된다. 손으로 하는 패스는 뒤로 해야 하지만, 발로하는 패스는 앞으로도 가능하다. 럭비공의 특성상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발로 이루어지는 플레이는 예측할 수 없어 더 박진감 넘친다.

▲ Hampton Court Palace의 화단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거친 럭비 경기를 보면 나는 항상 영국의 아름다운 화단이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화단은 그 절정의 시기가 다른 다년생 초화(Perennial)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화단에는 먼저 피는 꽃들이 뒤따라올 꽃들과의 조화를 생각하며 식재되어 있다. 화려하게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뒤이어 피는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 줄 준비를 한다. 럭비의 패스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것처럼 영국의 화단에서도 어떤 꽃에게 자리를 내어줄지 모르지만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화단이 되고 서로 완벽하게 패스를 주고받을 때 정원에서의 즐거움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또한 화단의 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변의 다른 초화가 배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화 속에 가끔 독특하게 눈에 띄는 꽃들은 화단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영국의 화단은 크게 ‘Bed’와 ‘Border’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단으로 알려져 있는 ‘Bed’는 정원 안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장소’ 또는 ‘숨을 수 있는 은밀한 장소’라는 개념으로 ‘Garden bed’라는 표현은 고대 게르만 언어에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10세기에 들어 ‘Wyrtbed’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wyrt’는 식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종합해보면 영국에서의 ‘Bed’는 정원이라는 공간에 식물, 특히 화려한 초화를 이용해 은밀하게 낮잠을 즐길 있을 만큼 편안한 장소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는 의미이다.

영국의 ‘Bed’는 두 가지 스타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로 블럭이나 나뭇가지를 격자모양으로 엮은 구조물을 화단의 테두리로 이용해 지면보다 약간 높게 올려 화단을 조성한 경우 ‘Raised Bed’라고 부른다. ‘Raised Bed’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형태로 중세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해 ‘Raised Bed’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 앉기에는 너무 낮아 불편한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 이야기들 중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중세시대에는 정원의 외부에서 질이 좋은 토양을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정원에서 어떤 식으로든 부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화단을 살짝 높게 만들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허브나 채소들을 ‘Raised Bed’에 많이 심었지만, 17세기에 들어서는 점차 초화류를 많이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높이를 올린 화단은 노력에 비해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원에서는 그 모습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상대적으로 몸을 덜 숙이고 채소를 수확할 수 있는 실용적인 형태로 제작된 ‘Raised Bed’는 영국의 키친가든(Kitchen Garden)으로 적용되어 발전할 수 있었다. 지금도 ‘Raised Bed’는 영국의 얼로트먼트 가든(Allotment Garden, 시민농장) 등에 보편적인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또 다른 형태는 ‘Carp Bed’로 17세기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Carp Bed’는 상록 관목을 이용해 네모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초화를 식재하는 형태로 잉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화단의 테두리가 잉어의 등지느러미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국의 화단은 온실의 발달과 함께 지금의 모습으로 발달하게 된다. 기후가 맞지 않아 식재가 용이하지 않은 식물은 온실에서 재배한 후 적당한 시기에 화단에 옮겨 심어 아름다움을 쉽게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당연히 정원사들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고, 많은 정원사들이 등장하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영국화단은 단일 수종을 가득 채워 하나의 색과 질감을 강조하는 형태로 발달하였지만,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윌리엄 로빈슨의 영향으로 인위적인 화단보다는 자연스러운 화단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밖에 다른 화단의 형태로 ‘Border’가 있는데 ‘Bed’의 형태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여 변형되거나 발전한 형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Border’는 경계선을 뜻하는 단어로 17세기 이전에는 정원과 별로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1591년 영국의 시인 애드문드 스팬서(Edmund Spenser)의 시에서 나비가 거미로부터 도망가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Border’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이 단어와 정원과의 연관성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기존의 직선적인 패턴을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Border’의 의미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경계를 의미했던 것이 경계를 따라 다양한 초화류를 심어 가꾸는 화단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Bed’가 주로 일년생 초화를 사용하는데 비해 ‘Border’는 다년생 초화를 이용하기 때문에 주로 허베이셔스 보더(Herbaceous Border)로 불리고 있다. 허베이셔스 보더는 현대 영국정원에 큰 영감을 준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에 의해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또 다른 정원디자이너 거투루드 지킬(Gertrude Jekyll)에 의해 그 화려함을 더하게 되었다. 거투루드 지킬에 의하면, 허베이셔스 보더는 정원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허베이셔스 보더는 믹스드 보더(Mixed Border)로 발전하여 영국의 많은 정원에 만들어지고 가꾸어지고 있다. 허베이셔스 보더나 믹스드 보더는 화단 안에서 초화들의 다양함과 조화가 가장 중요한 컨셉트가 된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화단은 좁은 공간에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지도록 조성된다. 단일수종으로 빼곡히 또는 듬성듬성 만들어진 화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때문에 화단을 조성할 때 서로 나쁜 영향을 주는 식물은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살려주고 단점을 보완해주는 배려의 디자인이 가장 영국다운 화단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영국의 거친 스포츠 럭비나 영국정원의 ‘Bed’나 ‘Border’를 보면서 치열한 경쟁의 인생이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앞서가는 사람을 더 밀어주는 조화로운 삶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 Sissinghurst Garden의 Carp b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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