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왕의 정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 어수문을 지나면 주합루 언덕에 서향각(書香閣) 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서향각 처마 안쪽에는 ‘친잠권민(親蠶勸民)’이라는 편액이 있고, 전면 기둥에도 ‘어친잠실(御親蠶室)’이라고 쓴 간판이 붙어 있다.

조선시대 왕과 황후가 궁의 정원 격인 후원에서 몸소 뽕나무를 재배하는 친잠의식을 벌여 백성들에게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지난 21일 박희성 서울시립대 연구교수(서울학연구소)는 서울 명동 커먼플레이스에서 ‘왕의 궁궐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에 나서 “후원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단지 유락과 감상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황후가 창덕궁 후원에서 친잠을 하거나 왕의 존재감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과거시험, 군사훈련, 신하에게 은덕을 베푸는 연회장소 등의 여러 목적으로 궁원이 사용됐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대표 궁원인 창덕궁 후원이 왕과 황후의 정치적 공간으로 권위와 위상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다는 의미다.

태종실록 14년에는 ‘만약 중국 사신을 응접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곳에서 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13년(1482) 실록에는 ‘후원의 땅이 넓고 빈 곳이 많으니 내년 봄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궁원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박희성 교수는 “후원은 괴석이나 화분 등을 감상하고 계절감을 느끼게 하는 1차적인 왕의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사복시의 말을 창덕궁 후원에 방목(1464년 세조 10년)하거나 청나라의 감시를 피해 활쏘기와 포쏘기를 시험(1639년 인조 17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1395년 태조는 3문 3조의 법도에 따라 경복궁을 지었지만, 정원만큼은 어떻게 지어야 한다는 큰 제약이 없었다”고 밝혔다.

중국과 일본의 궁원보다 자유롭게 지어진 경복궁 정원의 특징을 잘 만날 수 있는 곳으로는 교태전 후원 아미산과 경회루 그리고 향원지를 꼽을 수 있다.

향원지는 고종 때 건청궁이 건립되고 건청궁 전정으로 조성됐다.

고종 10년(1873)에 지어진 건청궁은 조선 전기에 문신시험을 치르고 활쏘기를 하던 서현정을 확장해 향원정과 향원지를 조성하고 궁성 북동부에는 녹산이라는 원림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에 박 교수는 “우리의 궁원은 흔히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왕이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 지어진 장소가 아니라 내농포와 같은 궁궐납품을 위한 채소밭으로 이용되거나, 여러 사료와 실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정형화된 유럽식 정원이나 방어적 역할을 주로 했던 중국의 정원보다 더 넓은 범위로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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