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미(LH 주택디자인처장,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도시내기인 내겐 여름방학이면 으레 놀러가던 시골 외갓집에 대한 아련한 기억과 그리움이 남아있다. 앞뒤가 툭 트인 대청마루에서 삶은 옥수수를 먹거나 뒤꼍을 향해 앉아 뒷동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우물가에 피어있던 봉선화 꽃잎으로 손톱을 물들이며 첫눈이 올 때까지 고운 주홍빛이 남아있기를 소망했던 기억,

외갓집 뜰엔 오동나무, 감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들이 풍성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봐주었고, 꽃밭엔 앵도나무, 칸나, 황매화, 함박꽃, 해바라기, 과꽃, 분꽃, 맨드라미, 봉선화, 꽈리, 채송화, 패랭이꽃, 나팔꽃들이 서로 질세라 예쁘게도 피었었다.

술래잡기를 하다 꽃을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엄하신 외할아버지의 불호령을 들어야 했지만 금세 아랑곳하지 않고 신나게 뛰어 놀았던 곳.
가끔 여행을 하거나 TV를 통해서 시골집 풍경을 대할 때면 머릿속엔 외갓집의 소박했던 정원에서 보냈던 기억들이 하나씩 따뜻하게 되살아난다.

1년에 수만 세대씩 공동주택을 공급하는 회사에서 조경 일을 하고 있는 나는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유년시절의 추억을 선물해줄 공간을 만들고 있는 걸까?

좀 더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공사 준공 후 입주자 모니터링을 통해 설계의 오류를 파악하고 그 내용을 설계에 환류 함으로써 동일한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설계를 개선해야 하고, 특히 놀이터 설계 시에는 직접 현장에 나가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놀이 시설물이나 나무, 꽃이 무엇인지 확인을 해봐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쏟아지는 물량에 쫒겨 발주도면 보기 바쁘다.

우리 직원들을 바쁘게 만드는 발주도면에 포함되는 공동주택단지 조경설계의 구성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면적이 200㎡를 상회하는 대지에 건축 시 법정 조경면적은 건축법에서 위임한 지자체 조례에 의해 용도지역 및 건축물의 규모에 따라 전체 대지면적의 5~15%의 범위 내에서 정해지는데 대지의 용도지역이 주거지역에 위치하는 경우, 많은 지자체에서 대지면적의 15%에 해당하는 조경면적을 요구하고 있다.

규모상 대부분 200㎡를 상회하는 대지에 지어지는 공동주택은 지자체 조례보다 법적위계가 높은 대통령령인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공동주택 단지면적의 30%에 해당하는 면적을 조경면적으로 계획하여야 하며 이중 10% 이상에 해당하는 면적은 자연지반 구조여야 한다. 조경의무면적 규정 중 예외적으로, 세대 당 전용면적이 85㎡이하인 주택을 전체 세대수의 3분의 2 이상 건설하는 경우에는 건축법에 따라 지자체의 조경면적 규정을 적용하여 공동주택임에도 30%의 조경면적을 확보하지 않아도 된다.

결정된 조경의무 면적에는 대상지역의 아파트 세대수가 일정 규모를 넘을 경우 규정에 따라 어린이 놀이터, 주민운동시설, 휴게시설, 유아 놀이터 등이 배치되어야 한다. 또한 건축법에서 위임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는 국토해양부 고시 조경기준에 의해 용도지역별로 조경면적 1㎡당 심어야하는 교목, 관목의 수량 및 교목의 규격이 정해지고, 교목은 상록교목을 전체 교목 수량의 일정 비율 이상을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결정된 조경면적에 관련 규정이 요구하는 시설들을 배치하고 정해진 수량대로 식재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제한사항이 많은 공동주택 조경설계지만 참신한 계획안을 들고 오는 설계자를 만나게 되면 매사 긍정적인 설계자에게 제약은 제약일 뿐임을 알게 된다.

최근에 접한 보금자리 A지구 조경설계 내용을 보면, 대지가 갖는 지형적 한계를 창의적인 놀이가 가능한 시설물로 디자인하여 아이들의 모험심을 이끌어내고 자연은 주말에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야 만날 수 있는 도시의 아이들에게 생육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한 넓은 잔디광장을 제공하여 바로 집 밖에서 사계절 변화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다양한 지피 초화류를 다량으로 도입하여 대규모 조경설계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아기자기함을 구현함으로써 단독주택 정원의 포근함을 제공하였고, 마트에서 사오는 것에 익숙한 각종 채소들을 직접 기르고 관찰할 수 있도록 소채원을 단지 곳곳에 설계하여 생생한 자연 체험과 생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2012년 LH공사는 전국 51개 지구 82개 블록에 약 7만 세대의 공동주택을 착공할 계획을 갖고 있어 올해도 도면과 씨름하는 바쁜 한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삭막한 콘크리트 벽에 갇혀 경쟁에 시달리며 컴퓨터와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 외갓집의 소박한 정원에서 내가 받았던 한없이 포근해지는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비록 공동주택의 좁은 조경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까워지고 소중한 유년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놀이터를 조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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