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간 리비아를 철권통치 했던 무소불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가다피도 요 며칠 사이에 민중의 봉기와 서방의 공격 앞에 무너져 가고 있다. 절대 권력의 비루한 최후를 또 한 번 지켜보는 인류는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할까?

문득 가다피를 인터뷰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1929 ~ 2006)’가 생각난다. 전쟁보도와 인터뷰 전문 저널리스트로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진 전설적 여전사 오리아나 팔라치는 5년 전 76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16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최대 주간지 ‘유럽인’의 특파원으로 베트남의 항불 독립 전쟁에 뛰어 들었고, 27세에 헝가리 민중봉기 종군기자를 지냈으며, 4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에서도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 터를 누볐다. 1967년에도 베트남 전쟁의 한 가운데 있었고, 1968년에는 멕시코시티 대학살의 종군기자를 지냈다. 그 이외에도 여러 차례의 라틴아메리카 민중봉기의 현장에서 생생한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현대사의 Genocide 현장은 그녀의 삶의 무대였다.

1980년 이후에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세계적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직격 인터뷰를 하는 전투적 인터뷰어가 그녀의 직업이 되어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녀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를 만날 때는 날밤을 새워 ‘수천 가지의 분노’를 가슴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이란혁명 이후 최고 통치자가 되었던 호메이니를 인터뷰 할 때, 면담을 위해 할 수 없이 차도르를 억지로 착용해야만 했던 그녀는 대뜸 호메이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차도르를 입고 어떻게 수영을 합니까?” “우리 관습에 대해 왜 당신이 이러쿵 저러쿵 합니까.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벗으세요!” 하는 호메이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도르를 벗어서 그의 발 앞에 팽개쳤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호메이니에게 그녀가 던진 말, “어디 가세요. 쉬하러 가십니까?”

호메이니를 비롯하여, 가다피, 덩샤오핑, 헨리 키신저, 빌리 브란트, 야세르 아라파트, 이디오피아의 하이레 셀라시에 황재,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인디라 간디, 구엔 반 티우, 골다 메이어, 줄 피카르 부토, 이란의 팔레비국왕, 레흐 바웬사, 달라이 라마, 영화배우 숀 코네리,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등이 그녀의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반도에서는 김일성도 김정일도 박정희도 김대중도 그 누구도 그녀의 공격적 인터뷰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인터뷰 도중 수박을 먹으며 이따금 트림을 하는 무하마드 알리의 쌍스러움을 참다 못해 그의 얼굴에 마이크를 집어던지며 “이런 무식한 촌놈을 챔피언이라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는 일화도 있다. 미 국무장관 시절 헨리 키신저도 호되게 당하여 “내 평생 최대 실수는 오리아나 팔라치의 인터뷰를 승낙한 것”이라고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녀의 인터뷰이 중에서 그녀가 가장 매료되었던 인물은 중국의 덩샤오핑이다. “천안문에 마오쩌뚱 사진을 언제까지 걸어둘 거냐?”는 첫 질문으로 그를 불편하게 하였건만, 이지적이며 꾸밈없는 인간성으로 막노동자처럼 소박한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마주 앉아 인터뷰 하던 도중 벌떡 일어나 그를 와락 껴안는 돌출행동에 경호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던 일화도 있다.

불같은 인생을 살다간 여전사에 얽힌 일화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다. 말년에 그녀를 역으로 인터뷰한 일본의 여기자 미츠코가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또 한 번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하다.

“당신이 평생 동안 인터뷰 했던 세계 최고의 권력자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대체로 교양도, 지식도, 철학도, 세계관도, 인내심도, 가정교육도, 감성도, 지성도, 윤리관도 일반인 보다 더 낫지 않았어요.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거대한 탐욕과,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밑도 끝도 없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권오병(아썸 대표, 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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